[김산환의 캠핑폐인] 안개, 꿈결 같은 세월

[김산환의 캠핑폐인] 안개, 꿈결 같은 세월

텐트 문을 열자 안개가 자욱하다. 강에서 피어난 안개가 낮은음자리로 몰려와 사위를 휘감았다. 짙은 안개 속에 등 굵은 소나무가 아련하게 서 있다. 소나무는 곧게 뻗은 것이 없다. 제멋대로 굽이지고, 배롱나무처럼 뒤틀렸다. 한 두 그루가 아니다. 소나무들은 어울려 숲이었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지에 먹물로 수놓은 수묵화처럼. 숲을 거닌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스며들 듯이 걷는다. 철 지난 캠핑장에는 아무도 없다. 사람도, 다람쥐도,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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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다가올 과거를 기다리며

[김산환의 캠핑폐인] 다가올 과거를 기다리며

12월의 마지막 달력이 넘어간다. 한 해가 지나간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도 잠시 후면 과거가 되어 추억의 책갈피에 갈무리될 것이다.시간은 그렇게 가는 것.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날아간다. 미래라 부르는 시간도 결국은 다가올 과거일 뿐, 모든 것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에게 시간이 할퀴고 간 자국은 선명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지나간 시간은 왜 아프기만 한 걸까. 왜 기억의 방에는 너무 아파서 다시는 꺼내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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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다람쥐와 모닥불

[김산환의 캠핑폐인]다람쥐와 모닥불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사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자랑이라면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훔쳐 민중에게 선사하려 했던 나 또한 민중의 자랑이다…….김남주의 시 ‘나 자신을 노래한다’의 일부분이다. 이 시를 멋들어지게 낭독하던 대학선배가 있었다. 당시 그는 학업을 작파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해 비밀스럽게 살아가고 있던 터라 후배들 사이에서는 신비로운 존재로 인식됐다. 그의 목소리는 성우 뺨 칠 만큼 좋았다. 선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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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내 낡은 텐트

[김산환의 캠핑폐인]내 낡은 텐트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었다. 우선 좋은 자리를 골라 텐트를 쳤다. 텐트를 다 쳐놓고 보니 많이도 낡았다. 이 텐트는 15년간 나와 함께한 캠핑의 동지다. 연둣빛 본체에 감홍색 플라이가 반짝반짝 윤이 나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빛이 바랬다. 당김줄을 세게 당기면 부르르 찢어질 것처럼 탄력을 잃었다. 연륜이라 하기에는 이제 너무 초라하다. 습기를 막아주는 플라이의 방수막은 헤질 대로 헤져 보푸라기가 일었다. 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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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카파도키아의 추억

[김산환의 캠핑폐인] 카파도키아의 추억

이 좋은 것을 혼자만 하고 있었단 말이야? 좋으세요?그럼,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어? 세상천지가 눈인데, 텐트 속에 들어앉아 따끈한 난로 쬐며 와인 마시는 재미를 어디서 맛볼 수 있겠어?선배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이상하군요.왜? 나는 이런 호사를 누리면 안 되나?선배는 안 가 본 곳 없잖아요? 세상의 좋은 곳이란 곳은 모두 가볼 수 있는 여행기자로 살아왔잖아요? 선배는 캐나다 퀘벡의 얼음호텔에서 자봤잖아요? 북극곰 가죽을 씌운 얼음 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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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DIY 캠퍼

[김산환의 캠핑폐인] DIY 캠퍼

나는 그를 DIY 캠퍼라 부르기로 했다. 그의 캠핑장비는 첫눈에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명 메이커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대부분 ‘남대문표’였다. 어떤 장비는 한 번도 같은 브랜드를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자잘한 장비들은 집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온 듯 했다. 그것도 대부분 빛이 바래고 낡았다. 오래 사용할수록 사용감이 돋보이는 명품이나 캠퍼의 경력을 말해주는 그런 빈티지와는 거리가 멀었다.DIY 캠퍼는 사이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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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기억하라, 생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김산환의 캠핑폐인] 기억하라, 생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텐트에 걸어놓은 온도계의 수은주가 영하 17도를 가리켰다. 까마귀도 얼어 죽을 만큼 추운 날씨다. 서둘러 난로에 불을 지폈다. 따끈한 온기가 텐트 안으로 퍼졌다. 밖이 환해졌다. 게으른 동짓달 해가 동편 산마루를 넘어온 것이다. 텐트 문을 열었다. 햇살이 어루만지는 숲에 상고대가 하얗게 피어났다. 순결하고, 눈부셨다.카메라를 챙겨 들고 나왔다. 서두르다 보니 양말 신는 것을 잊어버렸다. 걸음을 뗄 때마다 맨발의 살갗에 닿는 섬뜩한 기운이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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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인연 뒤에 남는 것

[김산환의 캠핑폐인] 인연 뒤에 남는 것

종로 5가의 등산장비점 골목은 여전했다. 내가 처음 군화처럼 둔탁하고 무거운 가죽 등산화를 사러 왔던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대학시절, 나는 이곳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다. 집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를 아껴서 등산장비를 하나씩 마련할 때의 그 뿌듯함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둠이 자욱하게 내린 비좁은 골목을 지나 닭 칼국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곳도 한때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이다. 김칫국에 끓여내는 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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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첫눈 오는 날

[김산환의 캠핑폐인] 첫눈 오는 날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내린다. 서해바다에 눈이 내린다. 목선들이 몸을 맞댄 채 삐거덕거리는 대천항에 눈이 내린다. 싱싱한 고기를 들어 보이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수산시장 아줌마 얼굴에도 뽀송뽀송한 눈송이가 내린다.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내린다. 텐트 지붕에 소곤소곤 사각사각 눈이 내린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눈이 내린다. 추억의 날개 때묻은 꽃다발**로 눈이 내린다. 세상이 가만가만 흰옷으로 갈아입고 순결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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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동요는 슬프다-겨울밤

[김산환의 캠핑폐인]동요는 슬프다-겨울밤

동요는 슬프다. 아이들의 밝은 마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재기발랄해야할 동요는 슬프다. 적어도 내가 어릴 적 듣고 자란 동요는 그렇다.대학교 1학년 때다. 밤새 퍼마신 술에 취해 잔디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함께 밤을 지새운 덩치가 산만한 동기 녀석이 뜬금없이 찔레꽃을 불렀다. 느릿느릿 끊일 듯 말 듯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노래가 끝이 났을 때 녀석은 그 큰 덩치로 훌쩍거리고 있었다. 내 눈에도 눈물이 번졌다.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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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작은 깃털 하나

[김산환의 캠핑폐인] 작은 깃털 하나

몇 달 동안 모습을 감췄던 친구가 캠핑을 가자고 연락이 왔다. 안락의자에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는 친구 부부는 편안해 보였다. 그는 잠수를 했던 몇 달 사이 일이 있었다고 했다. 둘째가 생긴 것이다. 첫째와 열 살 터울이다. 축하해. 뭘. 무거운 깃털 하나 어깨에 내려앉은 건데. 무거운 깃털? 낙타는 아주 작은 깃털 하나 더해졌을 뿐인데, 그 깃털의 무게 때문에 사막을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데. ‧‧‧‧‧‧.이 땅에 사는 남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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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나를 기억하는 일

[김산환의 캠핑폐인] 나를 기억하는 일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거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몸짓으로 흔들리거나 춤을 추거나 가늠할 수 없는 슬픔에 젖거나 지금 선 자리가 지구별과 반대되는 우주의 외딴 곳으로 느껴지거나 밟아도 꿈틀할 줄 모르는 깊고 깊은 우물 속이거나 내 영혼이 유리병에 갇혀 더 이상 누군가와 교감할 수 없거나 나란 존재가 너무 작아서 눈물이 날 때나 서러운 눈물을 닦아줄 누군가가 곁에 없거나 할 때 나에게 보내는 나의 위로만큼 따뜻한 게 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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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별무리 헤며 불러보는 그리운 사람 하나

[김산환의 캠핑폐인] 별무리 헤며 불러보는 그리운 사람 하나

참 별도 많은 밤이다. 툭 터진 하늘에서 쏟아져 나온 별들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은하수가 흘러가는 모습도 선연하다. 왜 일까. 겨울이 오고, 밤이 길어질수록 밤하늘의 별은 많아지는 걸까. 별은 왜 손발이 꽁꽁 얼도록 추운 날에 더 또렷하게 빛나는 걸까.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일찍이 윤동주가 읊었던 그 처연하고도 맑은 시처럼 별 하나의 사랑과 사람과 시절을 그려보게 된다.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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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그는 지금도 텐트 한 동이 전부다

[김산환의 캠핑폐인] 그는 지금도 텐트 한 동이 전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잡지사에 입사하던 날, 잘 부탁한다면 악수를 건네는 손길이 뭔가 허전했다. 내 눈길이 아래로 쏠렸다. 그의 손가락이 세 개였다. 새끼손가락과 약지손가락이 없었다. 눈길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싱끗 웃었다. 그와는 자주 파트너가 되어 취재를 다녔다. 등산 전문잡지다 보니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힘든 산행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땀을 많이 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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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바다, 비바리가 온몸으로 쓰는 인생사-제주캠핑(5)

[김산환의 캠핑폐인] 바다, 비바리가 온몸으로 쓰는 인생사-제주캠핑(5)

물 속 바위에 부딪힌 파도가 해변까지 날아오는 스산한 날 우도의 비바리들이 물질을 한다. 성급한 서울 처녀가 제주를 찾은 감흥에 겨워 신발을 벗은 채 산호사 해변을 거닐 때, 그녀의 친구들이 너무 춥다며 어서 나오라고 호들갑을 떠는 그날 비바리들은 머리를 타넘는 파도 속에서 자맥질을 하며 소라나 해삼, 전복을 건져낸다.그들이 잿빛 하늘을 향해 오리발을 치켜들고 물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해변에서는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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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우도의 사랑-제주캠핑 (4)

[김산환의 캠핑폐인] 우도의 사랑-제주캠핑 (4)

우도를 사랑한다. 섬 속의 섬을 사랑한다. 손톱처럼 투명한 조개껍질 파도에 젖는 산호사 해변을 사랑한다. 찰랑찰랑 밀려오는 너울 너머 그리움으로 솟은 한라산을 사랑한다. 돌담을 사랑한다. 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상우목동을 사랑한다. 파도처럼 싱그러운 청보리밭을 사랑한다. 해풍에 헤진 비바리의 얼굴처럼 모난 돌들이 쌓여 만든 돌담을 사랑한다. 인어의 노래처럼 파도소리 메아리치는 검멀래를 사랑한다.밤마다 남지나해를 태양처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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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바람2-제주캠핑 (3)

[김산환의 캠핑폐인] 바람2-제주캠핑 (3)

칼끝처럼 매서운 바람이다. 비자림 깊은 숲속에 텐트를 쳤는데도 바람이 사정없이 분다. 텐트를 마구 흔들어댄다. 폴이 부러질 것처럼 휘어진다. 바늘만 대면 펑 하고 터지는 풍선처럼 텐트가 부푼다. 오름에 묻혀 있던 저주받은 영혼이 다 쏟아져 나와 텐트를 흔드는 것 같다.텐 트 가 사 시 나 무 처 럼 흔 들 린 다.무섭다. 텐트와 함께 송두리째 날아갈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오늘 같은 바람이면 산굼부리에 깃든 억새도 뿌리째 뽑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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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바람 1-제주캠핑 (2)

[김산환의 캠핑폐인] 바람 1-제주캠핑 (2)

이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섭지코지 해변에 둥지를 튼 나의 텐트를 향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제주의 푸른 밤을 딛고 와 테이블에 놓인 책장을 넘기고, 내 머리칼을 가벼이 쓸고 가는 이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영혼의 밑바닥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바람에는 풋풋한 향기가 있다. 생머리를 찰랑이며 걷는 여인을 스쳐 지나 때 훅 끼쳐 오는 샴푸 향 같은.시인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자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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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삼류인생-제주캠핑 (1)

[김산환의 캠핑폐인] 삼류인생-제주캠핑 (1)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 우리의 인생이 삼류라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류, 혹은 일류와 가깝다고 여긴다. 그 러 나, 목포에서 제주 가는 카페리는 우리 인생이 삼류라는 것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의자도 없이 평상처럼 펼쳐진 삼등실에 들어서면 누구랄 것도 없이 스타일이 구겨진다. 설령, 제주를 찾는 기분에 들떠 옷매무시에 힘을 주고, 머리를 매만졌다고 해도 적당한 파도와 너울로 울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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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의 캠핑폐인] 가을은 하늘 먼 곳에서 물결처럼 밀려오고

[김산환의 캠핑폐인] 가을은 하늘 먼 곳에서 물결처럼 밀려오고

검은 하늘에 섬광이 번쩍한다. 하나, 둘…. 미처 셋을 세기도 전에 천둥이 친다. 바로 머리 위에서 번개가 내린 모양이다. 그렇게 번개와 천둥이 몇 번 텐트를 두들기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빗줄기가 세차다. 텐트 속은 난타의 공연장처럼 빗방울 긋는 소리로 낭자하다. 바람도 사정없이 분다. 밤나무 그늘 아래 친 텐트 위로 밤송이가 투두둑 떨어진다. 가을비치고는 너무 요란스럽다. 본래 가을비는 뼛속까지 스밀 듯이 슬금슬금 내리는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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