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텐트에 걸어놓은 온도계의 수은주가 영하 17도를 가리켰다. 까마귀도 얼어 죽을 만큼 추운 날씨다. 서둘러 난로에 불을 지폈다. 따끈한 온기가 텐트 안으로 퍼졌다. 밖이 환해졌다. 게으른 동짓달 해가 동편 산마루를 넘어온 것이다. 텐트 문을 열었다. 햇살이 어루만지는 숲에 상고대가 하얗게 피어났다. 순결하고, 눈부셨다.

카메라를 챙겨 들고 나왔다. 서두르다 보니 양말 신는 것을 잊어버렸다. 걸음을 뗄 때마다 맨발의 살갗에 닿는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얼어붙은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카메라를 잡은 손은 얼었고, 귓불은 홍시처럼 붉었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 지독한 겨울이 흘러가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떡갈나무와 자작나무, 겨울이 가면 사그라질 잡풀 대궁에 달라붙은 상고대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뿌듯했다. 난로 가에 앉아 몸을 녹였다. 새벽 댓바람부터 고생한 보람을 확인하고 싶었다. 액정화면을 켰다. 그런데 아무 것도 뜨지 않았다. 아뿔싸, 카메라에 메모리 카드가 없었다. 빈 카메라만 정신없이 돌린 것이다. 내가 누른 카메라 셔터만큼, 기록하고 싶었던 겨울풍경이 풍선 터지듯, 내 기억 속에서 빠르게 지워졌다. 시린 겨울 아침의 산책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메모리 카드 없이도 삶을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만약, 우리를 스쳐가는 모든 시간들이 메모리 카드 없이 누르는 카메라의 셔터와 같다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지나간 시간이 그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비어 있다면, 그 당혹감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기억하라
생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설령, 육체가 허물어져 그 기억들이 가뭇없이 훌훌 날아간다 해도
깨어있음으로 기억하고
살아있음으로 기억하라.
그 소중한 기억을 나누라.
서로의 기억이 모이면
끊기고 토막 났던 시간의 틈도 메워질 것이며,
우리의 삶도 그대, 혹은 당신과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다.
기억하는 시간들이 고통이거나 상처라도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될 것이니,
기억하라, 생이 허락하는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