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환의 캠핑폐인] 별무리 헤며 불러보는 그리운 사람 하나

[김산환의 캠핑폐인] 별무리 헤며 불러보는 그리운 사람 하나

겨울캠핑 - 유명산 캠핑장

발행일 2011-10-18 11:15:44 김산환 칼럼리스트

 

참 별도 많은 밤이다.

툭 터진 하늘에서 쏟아져 나온 별들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은하수가 흘러가는 모습도 선연하다. 왜 일까. 겨울이 오고, 밤이 길어질수록 밤하늘의 별은 많아지는 걸까. 별은 왜 손발이 꽁꽁 얼도록 추운 날에 더 또렷하게 빛나는 걸까.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일찍이 윤동주가 읊었던 그 처연하고도 맑은 시처럼 별 하나의 사랑과 사람과 시절을 그려보게 된다. 그 사람들 속에는 이제는 남처럼 느껴지는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나도 있다. 그리고 또, 얼굴이 눈처럼 하얗던 그 아이도.

중학교 3학년 때다. 충주가 고향인 친구가 전학을 왔다. 하모니카를 구수하게 잘 불었던 녀석과 나는 금방 친구가 됐다. 당시 나는 클래식 기타에 심취해 있었다. 우리는 고입시험이 코앞인데도 틈만 나면 녀석의 자취방에 뒹굴며 하모니카와 기타 합주를 한다고 폼을 잡곤 했다.

중3의 겨울방학은 지루했다. 온종일 방구들 지고 빈둥빈둥 노는 것이 전부였다. 그 때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 고향집으로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심심해서 주리를 틀던 차에 그보다 반가운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내 생애 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자연스레 마음이 들떴다.

친구의 고향집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오지였다. 아침 일찍 나섰지만 친구가 일러준 버스 승강장에 도착한 것은 점심을 한참 넘긴 후였다. 산골의 짧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고 했다. 친구는 버스 승강장에서 1시간 가까이 나를 기다렸던 터라 귓불이 홍시처럼 얼어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친구의 집은 멀었다.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나는 그처럼 높고 웅장한 산을 처음 보았다. 길은 눈이 하얗게 쌓인 큰 산 사이로 나 있었다. 친구의 말로는 이 길을 따라 가다 고개를 넘으면 경상도 땅이라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친구의 집은 월악산 뒤편의 어느 산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곳이 어딘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먼 곳에서 청주까지 유학을 온 친구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1시간쯤 걸었을까. 친구는 이제 다 왔다며 피곤한 나를 달랬다. 그때 길 저쪽에서 한 청년이 나타났다. 어깨가 넓은 그 청년은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덥석 내 가방을 낚아챘다. 나는 그가 친구의 형이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성큼성큼 앞서서 걷는 그를 두고 친구가 한 말은 나를 아연 실색케 했다.

"우리 집에서 머슴 사는 형이야."

머슴! 이게 무슨 말인가. TV문학관도 아니고, 1980년대에 머슴이라니.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 형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 얹혀살다가 초등학교도 못 마치고 자신의 집에 머슴을 살러 들어왔다고 했다. 가을이면 새경을 모아서 주는데, 재산이 제법 된다고 했다. 친구는 형이 몇 해만 더 일하면 독립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요즘 세상에 머슴이라니.

나는 친구의 집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친구의 부모는 내가 이 촌구석까지 와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또한 자식이 대처에서 친구를 사귄 것도 대견스럽게 여겼다. 내가 친구네 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 동안 머슴, 아니 나보다 세 살 많은 그 형은 이른 새벽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일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세 곳의 아궁이에 군불을 땠다. 또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써서 여물을 먹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낮에는 몇 번이고 지게 가득 땔감을 져 날랐다. 그의 일은 사발에 고봉으로 저녁밥을 먹은 후에야 끝이 났다.

저녁을 물리고 나면 우리들의 시간이 시작됐다. 나와 친구, 친구의 고향 친구들은 머슴 형의 사랑방을 아지트 삼아 모였다. 우리들은 시큼시큼한 총각냄새가 물씬한 형의 방에서 밤늦도록 화투를 쳤다. 화투에서 단연 돋보였던 것은 형이었다. 그는 어떤 종류의 화투를 쳐도 늘 승자였다. 그는 화투로 노는 방법을 훤히 꿰고 있었다. 민화투만 알고 있던 나는 그에게서 고스톱이나 육백, 뽕 같은 걸 처음 배웠다.

화투만 잘 친 게 아니었다. 형의 손끝은 아주 매웠다. 노동으로 다져진 그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당시 돈이 없었던 우리들은 판돈 대신 손가락으로 이마와 손목 때리기를 걸고 화투를 쳤다. 물론 대부분 형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면 형은 싱글싱글 웃으며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형이 그 손가락으로 이마를 때릴 때는 별이 번쩍했다. 형이 검지와 중지를 모아 손목을 때릴 때는 손목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다음 날 아침이면 맞은 자리에 피멍이 들어 친구의 엄마가 깜짝 놀라곤 했다. 그래도 나는 신이 났다. 미처 몰랐던 어른들의 세계를 훔쳐보는 재미가 꿀맛이었다.

그때 머슴 형과 함께 그 사랑방을 빛나게 해줬던 아이가 있었다. 나와 한 살 터울인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 아이는 큰집에 만두 빚은 것을 전해주러 왔다가 얼떨결에 우리 패거리와 합세했다. 그 후 그 아이는 내가 친구 집에 머물던 사흘 내내 찾아와 밤늦도록 어울렸다.

나는 그 아이를 처음 볼 때부터 가슴이 뛰었다. 친구와 친구의 친구들은 그녀와 한 동네에 살았던 탓인지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와 같이 있으면 고개도 들지 못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황급하게 시선을 깔았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때 내 나이 15세.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 때였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데, 그 아이가 밤마다 형의 방으로 왔던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다. 나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 친구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는 저녁이면 무슨 볼 일이 있는 것처럼 그 아이 집으로 갔고, 그 아이는 자신을 일부러 데리러 온 사촌 오빠를 뿌리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아이와 처음 손을 잡은 것은 이불 속에서였다. 그때 우리는 화투가 시들해지면 여러 가지 게임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전기 게임이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불 속에서 손을 맞잡고 하는 이 놀이는 술래가 신호를 보낸 사람을 맞추는 게임이었다. 신호는 마주잡은 손을 움켜쥐는 것으로 보냈다.

전기 게임을 할 때 그 아이는 내 오른편에 앉았다. 우리는 검은색 물을 들인 무명 이불 속에서 손을 맞잡았다. 우람한 내 손 안에 그 아이의 손이 쏙 들어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손바닥이 금방 땀으로 촉촉해졌다. 나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얼마 후 신호가 왔다. 그 아이가 내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우리는 그렇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놀이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아이를 정면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불 속에 맞잡은 손을 통해 나의 애틋한 마음이 그 아이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전기 게임을 하면서도 밤새도록 이 놀이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 이성에 눈 뜬 그 밤이 영원토록 계속되기를 빌었다.

손톱만한 초승달이 나뭇가지에 걸린 칠흑 같은 겨울밤. 그 아이를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다 하늘을 봤다. 아, 별은 어떻게 저리 많을 수 있을까. 밤하늘에서는 폭죽이 터진 것처럼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흰 눈이 세상을 뒤덮은 그 밤에 나는 생애 가장 많은 별을 봤다.

세월은 유성처럼 흘렀다. 지금은 친구 얼굴도, 친구 집에서 머슴을 살던 형도, 나에게 풋사랑의 가슴 설렘을 안겨주었던, 얼굴이 눈처럼 희던 그 아이의 얼굴도 다 잊혀졌다. 그들은 모두 반짝이는 별이 되어 내 기억의 저편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지나간 것들은 그립다. 내 가슴에 별이 되어 남은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들도 나처럼 가끔 별을 보며 잊혀진 사람들, 세월의 저편에서 반짝이고 있을 추억을 떠올릴까. 나를 기억해줄까. 참 별도 많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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