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좋은 것을 혼자만 하고 있었단 말이야?
좋으세요?
그럼,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어? 세상천지가 눈인데, 텐트 속에 들어앉아 따끈한 난로 쬐며 와인 마시는 재미를 어디서 맛볼 수 있겠어?
선배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이상하군요.
왜? 나는 이런 호사를 누리면 안 되나?
선배는 안 가 본 곳 없잖아요? 세상의 좋은 곳이란 곳은 모두 가볼 수 있는 여행기자로 살아왔잖아요? 선배는 캐나다 퀘벡의 얼음호텔에서 자봤잖아요? 북극곰 가죽을 씌운 얼음 침대에서 아침을 맞았잖아요? 일본 아키타의 눈으로 만든 집에서도 따끈하게 데운 청주를 마셨잖아요. 가마쿠라라 부르는 이글루에서 오늘처럼 함박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봤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그곳에 있을 때 나는 혼자였어. 그곳에는 당신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을 친구가 없었어. 당신도 알잖아? 여행이 주는 호사스런 고독과 쓸쓸함 말이야. 그런데 오늘은 달라. 당신이 있고, 눈이 있고, 와인이 있고, 입에 착착 달라붙는 문어와 소라 같은 안주가 있잖아.
지금도 여행이 좋으세요?

응. 좋아. 올해 열 번쯤 외국엘 갔어. 일 년에 백일은 해외에서 지낸 셈이야. 내년에도 그만큼 또 외국에 나갈 거야.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해외로 취재를 갈 거야. 당신도 한때 그렇게 살았잖아? 여행을 좋아했잖아?
혼자만의 여행은 할 만큼 했지요. 그게 직업 때문이든, 좋아서든지 간에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때 여행 다녔던 게 남의 일처럼 여겨져요. 마치 신기루를 따라 다녔던 것만 같아요.

나는 지금도 여행이 좋아. 배낭만 보면 가슴이 설레. 하지만 오늘 밤은 정말 특별해. 이렇게 행복한 기분은 오랜 만이야. 겨울 캠핑이 이렇게 운치 있는 줄 처음 알았어. 밖에서 눈을 좀 맞아야겠어, 눈 맞으며 와인 마시는 멋을 부려도 괜찮겠지?
물론이죠. 캠퍼라면 누구나 눈 오는 날의 캠핑을 꿈꾸죠. 눈은 평등합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주니까 말이에요.
.
.
.
우리가 얼마 만에 함께 여행을 떠난 거지?
4년 만이네요. 터키 카파도키아가 마지막이었죠? 그러고 보니 그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네요.
그런가? 서로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카파도키아의 암굴집 기억하세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버섯 모양의 바위에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는 그 동굴로 된 집 말이에요. 스머프가 사는 집의 모델이 되었다고 했잖아요?
그럼, 기억하고말고. 그때 버섯 바위 위로 낮달이 떴고, 그 하늘을 배경으로 당신과 기념사진을 찍었지.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일도 생각나는군. 참 독특한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지.

텐트를 칠 때마다 그 암굴집을 떠올리곤 해요. 암굴집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것처럼, 텐트는 제가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지상의 거처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지켜야 할 가치와 신념이 이 텐트 안에 있다는 믿음 같은 게 생겼어요.
어려운 이야기군.
앞으로는 선배처럼 자유롭게 떠날 수 없을 거예요.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꿈꾸지 않기로 했어요. 그렇다고 서운하지는 않아요. 내가 잃은 것만큼 또 무엇인가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게 인생이잖아요?
그건 당신 말이 맞아. 사는 일은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아. 물은 길이 막히면 얕은 곳을 찾아 흘러가기 마련이지. 물은 근원의 바다에 닿을 때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거든.
예전에는 인생이 혼자 흘러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혼자 걷고, 혼자 여행하고, 혼자 격정에 취하는 그런, 자아만이 유일한 동행이라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내 안이 가족이 있어요. 영원한 동행이 생긴 거죠.
그건, 등 기대고 쉴 수 있는 든든한 나무를 얻은 거야. 가족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야. 축하해.
.
.
.
눈이 참 곱죠?
그래 정말 고와. 이렇게 오랫동안 눈을 바라본 적이 있을까. 아마 처음 일거야. 고마워. 나에게 눈을 선물해줘서. 오늘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겨울 중에 하루 일거야.
눈은 제가 드리는 선물이 아닙니다. 자연이 베푼 거죠. 겨울을 찾아 나선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그런 선물. 그게 전부죠. 마음껏 즐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