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로 5가의 등산장비점 골목은 여전했다. 내가 처음 군화처럼 둔탁하고 무거운 가죽 등산화를 사러 왔던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대학시절, 나는 이곳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다. 집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를 아껴서 등산장비를 하나씩 마련할 때의 그 뿌듯함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둠이 자욱하게 내린 비좁은 골목을 지나 닭 칼국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곳도 한때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이다. 김칫국에 끓여내는 닭 한 마리를 뜯고, 남은 국물에 칼국수를 푸짐하게 넣어 먹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든든했다. 오늘도 그때처럼, 닭 칼국수 집마다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 나온 직장인들로 왁자지껄했다.
눈에 익은 닭 칼국수 집이 보였다. 미닫이문을 열었다. 구수한 닭 칼국수 냄새가 확 끼쳤다. 식당 안쪽에서 여럿이 손을 흔들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얼마 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인가. 나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에게는 동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등산잡지에서 일하던 이십대 후반, 백두대간을 함께 종주했던 사람들이다. 그들과는 꼬박 2년 동안 산을 탔다. 스물 갓 넘은 처녀에서 사십대 중반의 육군 중령까지 서른 명쯤의 우리들은 매달 산을 내려온 그 자리에서 다시 산에 올라 백두대간을 훑어갔다.

우리는 적어도 한 달에 이틀은 산에서 밤을 보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았다. 길을 잃고 헤맬 때는 바위를 끌어안고 밤을 샜다. 영하 30도를 넘는 혹한에는 동면에 들어간 뱀처럼 서로의 몸을 난로 삼아 잠을 잤다. 물이 없는 고통의 밤은 또 어떠했던가. 그 고난에 찬 시간을 우리는 전설이라 불렀다.
그 후 십 년 세월이 흘렀다. 백두대간에서 맺은 우정은 영원할거라던 우리의 다짐에도 조금씩 균열이 갔다. 나와 그들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아니,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바쁜 것은 늘 나였다. 나는 가뭄에 콩 나듯이 모임에 나갔을 뿐이지만,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쯤은 산에서, 종로 6가의 닭 칼국수 집에서 돈독한 우정을 나누어 왔다. 나는 늘 모임에 나가지 못한 부채감에 시달렸다. 오늘 어렵게 시간을 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한 모양이었다. 옛 얼굴이 희미해질 만큼 달라진 사람도 있었다. 수줍음이 많던 앳된 처녀는 아줌마 티를 풀풀 내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자랑을 늘어놨다. 군납 건빵을 원 없이 먹게 해줬던 육군 중령은 진즉에 예편해서 요즘은 결혼식 주례로 소일하고 있다고 했다. 르망 자동차에 6명의 동지들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던 ‘운짱’은 지금도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교통편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 5학년으로 우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만화가 형님의 아들은 벌써 군복무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옛 동지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며 눈빛을 나누는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영선이 누님은요?
내 질문에 갑자기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늘 모임의 중심이 되던 만화가 형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영선이 먼저 갔다. 지난 겨울에 췌장암으로 먼저 저 세상 갔어. 걔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입만 열면 백두대간 얘기만 했대. 그때 산에서 함께 뒹굴던 우리들 이름 하나씩 부르며 그 얘기만 했대. 그런데 죽기 전에 한 명도 부르지 않았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면서도 아무도 부르지 않고 갔어.
나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말없이 술잔을 들자 만화가 형님이 말을 이었다.
너두 알지? 걔 마흔 넘어서 시집간 거. 장례식장에 갔는데, 다섯 살 난 딸이 있더라. 초승달처럼 눈초리 쳐지고, 얼굴이 새하얀 게 엄마 쏙 빼닮았더라고. 그걸 두고 어떻게 갔을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늘은 그래서 모인 거야. 이제 두 달에 한 번씩은 모이기로 했어. 한 사람이 오든 두 사람이 오든 간에 약속을 잡을 거야. 여기도 좋고, 산도 좋고 다 좋아. 누군가 떠났다면 최소한 인간의 도리는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더 이상 작별 인사도 없이 보내지는 말아야 하잖아?
백두대간 동지의 부고를 들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4년 전에는 종주대를 이끌던 우리들의 영원한 대장이 세상을 떴다. 북한산에서 암벽등반을 하다 추락한 것이다. 산에 다니는 사람이 산에서 죽는 것만큼 영예로운 것도 없다지만, 그는 너무 젊었다. 그에게는 여드름 꽃이 피기 시작하는 생때같은 아들과 곱게 눈 흘길 줄 아는 아내가 있었다.

그를 보내던 날 많이 울었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가 떠난 것이 서러웠다. 이제 내 곁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는 것이 서러웠고, 내가 그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나이가 됐다는 것이 서러웠다. 그러나 나의 미안함은 그 때 뿐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모임에 소원했고, 그가 마지막 등반을 하던 북한산의 암벽에 그를 기리는 동판을 붙일 때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또 한 사람의 부고를 접한 것이다. 나는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밤이었다. 나는 그녀가 미웠다. 작별 인사도 없이 서둘러 떠난 그녀가, 아니 떠나보내서는 안 될 사람을 데리고 간 세월이 야속했다. 내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 언제나 부재했던 나란 존재에 화가 났다.
그 날 나는 또 사람들의 신세를 졌다. 급하게 마신 술 탓에 술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깍두기 접시에 코를 박고 말았다. 술자리가 파한 후 ‘운짱’은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나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는 것으로 마지막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세상은 흘러간다. 그러나 흘러가도 좋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면 한다. 이렇게 깊은 슬픔을 남기면서 떠나지는 말았으면 한다. 산에서 나눴던 그 깊은 인연과 밤을 새워도 다 할 수 없는 추억, 서로에게 보냈던 굳건한 신뢰, 이 모든 것을 안고 모두가 오래오래 우정을 나누다 별이 되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