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시간으로 1월 21일 윌리암스가 한 월간지를 통해 새 시즌 사용될 레이스카의 단편을 공개하면서, 긴 겨울을 보내고 있는 F1 팬들의 갈증을 달래줄 2015시즌 ‘F1 레이스카 런치’의 행렬이 시작됐다. 2015시즌은 새로운 파워 유닛 도입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지난 2014시즌에 비해 규정 변화의 폭이 크지 않지만,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F1 레이스카의 특성상 사소한 바디워크 하나의 변화에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프리시즌 테스트를 전후해 진행되는 F1 레이스카 런치는 단지 ‘이렇게 모양이 바뀌었습니다’라고 단순하게 소개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F1 팀들은 레이스카 런치 날짜와 시간, 공개 방법, 공개되는 차량의 세부 구성까지 치밀하게 준비하면서 다른 팀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레이스카 런치의 과정에서 각 팀들은 치열한 머리 싸움을 펼치며 본격적인 챔피언십 경쟁을 시작하는 셈이다.

기선 제압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새 시즌을 앞둔 F1 레이스카 런치는 (대형 팀에 한정된 얘기긴 하지만) 상당히 화려하게 진행됐다. 역사적인 명소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소에서 레이스카런치 ‘쇼’가 펼쳐졌고, ‘우리가 이렇게 대단한 차를 만들었다’고 과시하는 듯한 사치스러워 보이는 이벤트가 이어지기도 했다. 모든 것이 세계 경제가 거대한 거품 속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2000년대 후반 세계 경제 위기 이후 F1 레이스카 런치는 확연하게 ‘검소’해졌다. 더 이상 사치스럽단 느낌의 레이스카 런치 ‘쇼’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고, 행사가 간소화된 것은 물론 별도의 런치 행사를 아예 생략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스트리밍을 통한 레이스카의 온라인 런치 행사, 혹은 오프라인의 런치 행사를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중계하는 등 비용을 최소화하고 효과를 높이려는 노력들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약간이나마 다른 팀들과 차별화된 런칭을 통해 기설을 제압하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다지 큰 이벤트는 아니지만 2015시즌 레이스카의 리버리 공개 행사를 멕시코시티까지 원정 가서 진행한 포스인디아의 경우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나가는 것, 남들보다 빠른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모터스포츠에서 발 빠르게 레이스카를 소개하는 움직임은 어느 정도 심리적인 효과를 기대할 만 하다.

페이크
그러나 기선 제압의 효과와 별개로 먼저 레이스카를 공개한다는 것은 다른 팀에게 자신들의 기술이나 개발 방향을 노출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때문에 각 F1 팀들은 레이스카 런치 행사나 공개되는 이미지에 차량의 중요한 부분이나 보여주고 싶지 않은 변화가 생긴 부분을 노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디퓨저 같은 부분은 아예 파츠를 붙이지 않은 레이스카가 공개되기도 하고, 프론트 윙 등 에어로 파츠는 지난 시즌의 파츠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선제적으로 레이스카를 공개하는 팀이 머리를 한 번 더 쓰는 경우도 있다. 먼저 차량을 공개한다면 다른 팀들이 그 내용을 분석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실제 레이스카의 개발 방향과 다른 파츠를 선보이는 방법이다. 미리 FIA의 승인을 받고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섀시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언제든 변경이 가능한 에어로 파츠라면 충분히 ‘페이크’를 써 볼 수 있다.
2014시즌 그랬던 것처럼 올 시즌 윌리암스는 월간지 F1 레이싱을 통해 일찌감치 새 차량을 공개했다. 하지만 렌더링된 이미지 속에 공개된 레이스카가 그대로 실전에 투입될 것이 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하위권 팀이라면 그럴 여유가 없겠지만, 상위권 팀이라면 뭔가 특별한 부분들이 없을 수 없고 개중에는 시즌 시작 전에 확 바뀔 부분도 많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모니터 하는 다른 팀들이 떠라 한다면 큰 코 다칠 페이크 파츠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먼저 공개된 레이스카에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다른 팀의 기술 인력들이 그 파츠를 분석하고 CFD를 돌려보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기만 해도 먼저 차량을 공개하는 팀이 상대적으로 얻는 이익은 상당할 수 있다.

자신감 표출
화려한 레이스카 런치 이벤트, 혹은 남들보다 한 발 앞선 레이스의 공개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자신들의 파워트레인과 레이스카에 대해서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메르세데스의 경우도 ‘일단 공개된 인터뷰 등의 내용’만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페이크 ‘따위’는 사용하지 않고 잔머리를 굴리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신차의 공개와는 조금 동떨어진 얘기일 수 있는 파워 유닛과 관련된 이야기는 메르세데스의 조금은 다른 입장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2015시즌의 시즌 중 파워 유닛 개발 동결이 무장 해제된 상황에서, 메르세데스 측이 최근 자신들은 2015시즌 파워 유닛 개발을 정상적인 스케줄대로 진행할 것이고 꼼수는 쓰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결과적으로는 규정에 헛점이 노출됐고 다수가 승인을 받은 채 그 헛점을 이용하는 상황에서 메르세데스가 독야청청하겠다고 폼을 잡을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메르세데스가 가지고 있는 자신감의 깊이는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도 페이크를 통해 상대를 기만하는 전술/전략을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솔직하고 단순하게 레이스카를 공개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많다. 일단 시즌을 앞두고 레이스카가 정상적인 퍼포먼스를 내주고 큰 문제는 없는지 확인해야 되는 입장에서, 꼼수를 쓰기 위해 파츠를 숨기고 바꾸는 것보다는 테스트 초기부터 훔쳐볼 테면 보라는 듯 처음부터 자기 스케줄대로 꾸준히 테스트에 임하는 것이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 넘치게 숨기는 것 없이 레이스카를 보여줬다고 해서, 그것이 또 페이크일지도 모르는 남들이 쉽게 그 길을 따라올 수는 없다. 결국 정공법이 잔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비장한 출사표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레이스카 런치는 언제나 비장하다. 이탈리아 계 ‘패밀리’의 가족 식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감도는 가운데 정장을 차려 입은 수많은 인사들이 도열해 신차의 공개를 바라보는 현장에서는 웃음기나 장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비장함이 묻어 나오는 큰 이유 중 하나는 페라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드라이버 )이 아닌 레이스카라는 사실이다.
과거 페라리가 다른 팀의 개발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최근 몇 년 간 참신한 아이디어로 타 팀의 ‘카피’가 우려됐던 적은 많지 않다. 2012시즌에는 프론트 서스펜션에 ‘풀-로드’ 방식을 채택하는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이후 이를 떠라 한 경우는 2013시즌의 맥라렌이 유일하다. 누가 쉽게 따라 할만한 아이디어 수준의 차별화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맥라렌의 실패에서 볼 수 있듯이 떠라 한다고 금방 효과를 볼만한 아이템도 아니었다. 신차 공개로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공개돼 손해를 보는 상황은 적어도 최근 몇 년 동안의 페라리에서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라리의 레이스카 런칭은 그 어떤 다른 팀의 경우보다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이벤트다. 프랜싱 호스에 걸맞은 레이스카가 소개되는 순간이 F1의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쓰는 것과 같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F1이라는 승부의 세계가 가진 이미지 그대로를 보여주는, 비장하기 그지 없는 출정식을 바라보며 팬들 역시 한 시즌 동안 치러질 ‘전쟁’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레이스카 런치는 각 팀에게 서로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진 이벤트다. 누군가는 남들보다 조금 먼저 차량을 공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기술 개발 경쟁에서 우위에 서거나 다른 이들을 기만하기 위해 덫을 놓는다. 어떤 팀에게는 자신감 넘치는 자기들만의 프로그램 스케줄의 일부일 뿐이고, 누군가에게는 전장에 나가는 출사표를 던지는 비장한 의식이다.
팬들 역시 레이스카 런치를 통해 새로운 시즌 그리드에 설 레이스카들의 모습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 동시에 F1 팀들이 런치를 통해 자신들의 마음가짐을 다지거나 적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는 치열한 머리 싸움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고요하고 차분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F1 팀들의 경쟁은 레이스카 런치에서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앞으로 몇 주간 이어질 레이스카 런치의 행렬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F1 팀들이 펼칠 한 시즌 동안의 전쟁을 제대로 즐기는 첫 걸음인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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