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지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부활을 알렸던 페라리가 바레인 그랑프리에서 4회 연속 포디엄 피니시에 성공했다. 바레인 그랑프리에서는 앞선 세 차례 그랑프리에서 모두 포디엄에 올랐던 세바스찬 베텔이 두 차례 실수를 범하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키미 라이코넨이 로스버그를 넘어 2위를 차지하며 페라리가 ‘팀으로서 강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라이코넨은 바레인 그랑프리를 전후해 그의 커리어에서 흔치 않은 압박에 노출됐었다. 2015시즌을 끝으로 페라리와의 계약이 종료되는 라이코넨의 재계약 여부는 그의 성적에 달려있다는 얘기가 계속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레인 그랑프리의 포디엄에 오른 직후 페라리의 보스 아리바베네는 라이코넨이 페라리에 남을 자격이 충분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이어갔다.
페라리는 2015시즌을 맞아 지난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레이스카를 만들어냈고, 두 명의 드라이버 베텔과 라이코넨도 최고의 퍼포먼스를 뽐내며 차량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티포시는 물론 F1 팬들 상당수를 흥분시킨 페라리 부활의 중심에는 새로운 리더 마우리치오 아리바베네의 리더십이 있다.

마라넬로의 공기가 달라졌다
처음 마우리치오 아리바베네가 마라넬로의 레드 팀을 이끌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을 때 기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아리바베네가 선수 출신도 아니고 F1 팀에서 일한 적도 없는 ‘외부인’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2000년대 중후 반부터 필립모리스와 페라리의 스폰서 관계를 지탱해온 중심 인물이고, 2010년부터는 F1의 모든 스폰서를 대표해 F1 커미션에도 참가해 F1의 핵심에 다가간 인물이었지만 어쨌든 F1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을 직접 체험한 적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리바베네는 F1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F1의 스폰서십과 정치 문제라면 충분히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랑프리 주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레이스 전략이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대한 지식 수준은 일반 F1 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 비슷한 문제로 많은 비난을 받았던 플라비오 브리아토레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브리아토레는 베네통과 르노를 이끌며 네 차례 드라이버 챔피언십과 세 차례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스가 시작되면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얘기까지 나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브리아토레가 인정받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그의 뛰어난 리더십과 예사롭지 않은 안목이었다. 부정적인 태도와 악행(?)도 많았지만, 챔피언 팀을 만드는 보스에게는 남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지금 페라리를 이끌고 있는 아리바베네에서 브리아토레 못지 않은 리더십이 느껴지고 있다. 게다가 브리아토레와 같은 부정적인 면은 아직까지 포착되지 않고 있다. 덕분에 보수적이고 어지간해서는 전통과 관례를 깨지 않는 페라리의 심장부, 마라넬로의 분위기까지 바뀌기 시작했다.
언제나 죽느냐 사느냐 사투를 벌이듯 심각한 분위기가 느껴지던 마라넬로의 공장에 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리바베네는 말레이지아 그랑프리 우승 직후 컨스트럭터 우승 트로피를 공장 한가운데 전시하고 점심 시간에 누구나 그 옆을 지나며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했다. 마라넬로에서 차를 만들기 위해 조용히 일하던 페라리의 직원들에게 아리바베네는 “이 트로피는 당신들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쉽게 꺼낼 수 있는 얘기도 아니었다.

페라리의 리더십이 달라졌다
시계를 돌려 말레이지아 그랑프리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우승을 거뒀을 때의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F1 그랑프리의 포디엄 세레머니에는 모두 네 명이 트로피를 받는다. 우승자와 2위, 3위로 레이스를 마친 드라이버가 포디엄에 오르고, 이들의 옆에 우승 팀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컨스트럭터 트로피를 받게 돼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컨스트럭터 트로피를 받는 자리는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는 자리인 만큼 혹시 기회가 온다면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자리다.
그런데 말레이지아 그랑프리의 포디엄에 아리바베네는 없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우승을 차지한 페라리였던만큼 팀 수석이 팀을 대표해 트로피를 받는 게 당연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아리바베네의 생각은 달랐다. 2년전 페라리가 마지막으로 우승을 거뒀던 2013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당시의 팀 수석 스테파노 도메니칼리가 트로피를 받았다. 잘했든 못했든 팀을 대표하는 인물이 간만의 기회에 포디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2015 말레이지아 그랑프리의 포디엄에서 컨스트럭터 우승 트로피를 받은 것은 디에고 로베르노였다. 로베르노는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대다수 중진들이 교체된 2015년 자리를 지킨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다. 오랜 동료 여럿이 팀을 떠나고 뒤숭숭한 가운데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한 핵심 인력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기를 살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아리바베네가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팀원들을 챙기는 장면은 단순히 포디엄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각종 TV 인터뷰가 쇄도할 때마다 아리바베네는 자신의 인터뷰 자리에 지나가는 다른 팀원을 불러 세우고 진행자가 묻지도 않은 소개에 시간을 할애했다. 카메라에 잡힌 미캐닉과 팀원들은 TV 화면에 거의 얼굴을 비춘 적이 없는 관리자나 리더가 아닌 일반 미캐닉들이었다. 방송 진행자로서는 원치 않는 장면이었겠지만, 아리바베네는 계속 얘기했다. “이 사람들이 우승을 만들었다.”라고.
앞서 2000년대 후반부터 2014년 초까지 페라리를 이끌던 스테파노 도메니칼리는 그의 리더십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좋은 성과가 있을 때 자신을 노출하고, 문제가 생기면 실무 책임자를 탓하거나 교체했다. 리더로서 성과를 낸데 공헌한 것이 당연히 있겠지만, 문제가 생긴 것은 역시 실무자가 잘못한 것일 테지만, 리더십이라고는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리바베네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드라이버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사실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올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바베네가 팀을 이끌게 된 이후 팀의 핵심 인력 상당수가 교체되고 그들 중 대부분이 페라리를 떠났다. 팀의 분위기가 삭막할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고, 역대 급으로 성적이 좋지 않았던 2014시즌을 생각하면 2015시즌 사지로 나가는 병사들의 표정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프리시즌 테스트를 시작하기 전 페라리의 레이스카가 공개됐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은 충격적이었다. 팀의 중진과 드라이버들이 새 레이스카 SF15-T 앞에서 웃고 있었다. 페라리가 한창 잘 나갈 때도 절대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사람들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이 사진 한 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014시즌 페라리에 복귀했던 라이코넨은 물론 새로 팀에 합류한 베텔도 연일 팀의 분위기가 좋다고 이야기했다. 베텔은 레드불 시절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진 것이 눈에 띄었고, 아이스맨이란 별명답게 무표정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라이코넨마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애 아빠가 된 덕분에 표정이 밝아진 것도 있겠지만, 팀 전체의 분위기가 밝아졌다는 사실 역시 부인 할 수 없었다.
아리바베네는 라이코넨이 전에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밝혔고, 베텔과 라이코넨 모두 레이스카의 개선을 위해 기대보다 훨씬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립서비스뿐일 수도 있지만 엔지니어들과 많은 토론을 나누는 장면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전보다 훨씬 많이 잡히는 것도 사실이고, 가라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것 역시 사실이다. 누가 보더라도 정말 좋아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느낄만한 분위기가 페라리에 만들어졌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페라리의 드라이버들이 이렇게 활기찬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슈마허가 페라리의 무적 함대를 이끌던 시절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팀의 중진들과 슈마허가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톱니바퀴가 착착 물려 돌아가는 팀을 만들었었다면, 현재의 페라리는 모두가 즐겁게 일하고 각자가 자신의 성과를 스스로 만들어가려는 의욕적인 팀으로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런 의욕적인 모습과 활기찬 분위기가 꼭 성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표를 달성하든 그렇지 못하든 ‘하얗게 불태웠다’라고 얘기하며 성취감을 느낄 것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페라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떤 인터뷰에서든 말을 돌려서 하지 않는 라이코넨은 여러 차례 ‘페라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언급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 얘기는 매우 중요하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최근 몇 년 간 페라리는 누가 봐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만 한다고, 채찍질을 한다고, 시간을 들여 일한다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건만,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의 페라리는 그런 우를 범했다.
그러나 리더십이 바뀌면서 페라리는 분명히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아리바베네는 리더로서 방향을 제시할 뿐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알려줄 능력이 없다. 그리고 리더는 그런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있을 필요도 없다. 리더는 각각의 분야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구체적으로 이런 이런 것을 하라고 지도하는 대신 그들의 의욕을 살려주면 된다. 아리바베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바베네는 다루기 힘든 두 명의 챔피언 라인업도 완벽히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관리가 드라이버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고 ‘내 말 들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베텔이 시즌 초반 분명히 앞서가는 모습을 보였지만 페라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퍼스트/세컨드의 구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반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레인 그랑프리 레이스 초반 속도가 떨어진 베텔을 바짝 뒤쫓던 라이코넨은 팀 라디오로 ‘베텔이 느리다, 그러니까 내가 추월하도록 노력해보겠다.’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페라리의 핏월은 어떤 팀 오더도 내보내지 않았고, 그런 팀 오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드라이버들이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최근 몇 년 시즌 초 중반부터 팀 오더로 논란을 키웠던 사건들과 크게 대조되는 장면이었다. 매 그랑프리마다 불안함이 느껴지는 메르세데스의 그것과도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물론 페라리의 드라이버들은 분명 시즌 후반이 되면 한 명의 드라이버를 밀어주기 위해 다른 드라이버가 희생하게 될 것이다. 페라리의 드라이버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 길을 가고 있고, 시즌이 1/4도 지나기 전에 쓸데 없이 의욕을 꺾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페라리가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적군에 포위당한 채 침몰해가는 전함의 함장을 맡은 마우리치오 아리바베네는 올바른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줬다. 포디엄에 오르는 대신 밑에서 팀원들을 올려다보며 목이 터져라 ‘나는 죽을 각오가 돼 있다! 나는 죽을 각오가 돼 있다!’라고 되뇌이는 이탈리아 국가를 불렀다. 자기보다 잘 아는 사람에게 실무의 권한을 전적으로 넘겨주고, 잘 한 일이 있으면 모두 아래 사람의 공으로 돌린다. 그렇다고 부끄럽다고 숨지도 않고, 언제나 당당한 모습으로 팀을 대표해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리바베네 덕분에 페라리의 팀 분위기가 달라졌고, 드라이버가 달라졌다. 어찌 보면 차량의 성능이 달라진 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다. 차량의 성능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레이스의 성적도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하지만 방향을 바로잡고 모두가 의욕적으로 즐겁게 일한다면 한 번 실패하더라도 다음 기회를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팀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리더 아리바베네를 따르게 됐다. 스쿠데리아 페라리 부활의 가장 중요한 열쇠였던 아리바베네의 리더십에 부러움과 함께 깊이 존경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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