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F1 러시아 그랑프리가 끝난 뒤 중소 독립팀들과 관련된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2010년 F1에 뛰어든 신생 3팀을 계승해 다섯 시즌 째 경쟁 중인 케이터햄과 마루시아가 미국 그랑프리에 불참한다는 소식이었다. F1 팀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전대미문의 사건은 아니지만 시즌 중후 반 같은 시점에 두 팀이 한꺼번에 그랑프리 불참을 알린 것은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단편적인, 개별 팀의 문제라기보다 F1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했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
2014 F1 미국 그랑프리를 전후해 F1 팀 관계자는 물론 F1 패독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중소 독립팀의 재정 문제에 쏠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F1 팀의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분위기 속에 물밑 접촉이 이뤄졌고, 미국 그랑프리를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중소팀을 구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F1의 중소 독립 팀들이 어떤 위기에 빠져있고, 왜 그들을 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도록 하겠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2014 F1 미국 그랑프리에 11팀 22대가 아닌 9팀 18대의 레이스카만이 참가하는 사태의 시작은 케이터햄의 재정 위기부터 시작됐다. 이미 러시아 그랑프리를 앞두고 심각한 재정 압박을 받고 있던 케이터햄은 미국 그랑프리를 2주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채권자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 케이터햄 F1 팀의 자산은 채권자에 의해 개별 매각될 위기에 처했고, F1 그랑프리에 참가할 수 있는 레이스카를 포함한 장비는 모두 창고에 동결돼버렸다.
케이터햄 F1 팀에서는 어떻게든 그랑프리 불참 사태만은 막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미국 그랑프리를 일주일 앞두고 채권자에게 팀을 넘기는 것으로 결론을 지으며 백기 투항하고 말았다. 현재 케이터햄의 채권자들은 F1 팀을 살리는데 큰 의욕이 없기 때문에 팀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 되었다.
케이터햄의 미국 그랑프리 불참이 확정되기도 전에 마루시아 F1 팀에서도 비슷한 소식이 들려왔다. 역시 채권자의 압박에 굴복한 마루시아 팀 역시 미국 그랑프리에 불참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결국 FOM의 공동 물류 시스템이 제공하는 항공기에 케이터햄과 마루시아의 짐은 실리지 않았다. 미국 그랑프리는 아홉 팀만이 참가하는 조촐한 이벤트로 변했고, 규정에 명시되지 않은 18대의 레이스카에 맞춘 조치들이 내려졌다.
미국 그랑프리가 개막되자, 케이터햄이나 마루시아보다는 조금 상황이 양호하지만 역시 재정적으로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는 중소 독립팀, 자우버, 포스인디아, 로터스가 미국 그랑프리를 보이콧할지 모른다는 루머가 흘러나왔다. 일부 팀은 공개적으로 루머를 부인했지만, 다른 팀에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레이스를 채 24시간도 남기지 않은 시점부터 F1 수프리모 버니 에클스톤과 독립 3팀 대표간의 비공개 협상이 펼쳐졌고, 다행히 미국 그랑프리의 레이스 보이콧 사태는 펼쳐지지 않았다.

중소팀 재정 위기의 원인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문제는 과도하게 증가한 F1 팀의 운영 비용에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F1 팀들의 연합기구인 FOTA가 발벗고 나서 ‘비용 제한 협정’을 체결하고 팀의 예산을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해온바 있다. FIA가 규정 개정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추진한 비용 절감 노력과 더불어 비용 제한 협정은 중소 팀들에게 최소한의 숨통을 트이게 해줬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최근 1, 2년 사이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페라리, 레드불 등 대형 팀들이 비용 제한 협정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대형 팀을 중심으로 FOTA를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FOTA의 붕괴는 그나마 최소한의 경제적 문제 발생을 막아주던 시스템을 무너뜨렸고, 2014시즌 새 규정에 맞춰 투입된 파워 유닛의 가파른 가격 인상은 결정타를 날렸다. 올 시즌 성능 면에서 가장 나쁘다고 평가 받으면서도 가격은 페라리, 메르세데스보다 더 비쌌던 르노 파워 유닛을 사용하는 케이터햄이 먼저 붕괴된 것도 이런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중소 독립 팀들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 중 가장 큰 두 가지는 불공정한 수익 분배 시스템과 대형 팀들의 뜻대로만 의사를 결정하는 구조적 문제다. 성적이 좋은 팀이 많은 수익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FOM과 각 팀이 개별적으로 체결한 콩코드 협정은 공개되지 않은 계약에 따라 불평등하게 수익을 분배한다. 자동차 제조사나 대기업을 위주로 짜여진 판은 중소 팀들의 기본적인 운영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고, 개발 비용이 부족해진 팀들은 더욱 성적을 내기 어려운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F1 팀의 의사 결정 기구를 대형 팀 위주로만 구성한 것이 문제를 키웠다. 결국 FOM과 FIA는 대형 자동차 제조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파워 유닛 규정을 개정했고, (수익 분배가 없어도 어차피 큰 돈을 쓸) 대형 팀들의 배를 불리는 계약으로 수익 분배에 크게 의존하는 중소 팀들의 몰락을 재촉했다. 마치 대기업을 살리기 위해 중소 상공인의 고혈을 빠는 신 자유주의적 정책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 결과 케이터햄과 마루시아 두 팀이 공중 분해 위기에 처했고, 자우버, 포스인디아, 로터스 순으로 연쇄 붕괴의 위기가 찾아왔다.

왜 중소팀을 살려야 하나?
F1을 잘 모르는 이들 중에는 ‘1등만 기억된다’는 신념 아래 경쟁력 없는 중소 팀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점이라면 도대체 왜 맨날 최하위에 머물면서, 1등을 차지할 가능성이 0.01%도 없는 경쟁에 나서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1등을 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로 스포츠의 정신이고, F1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게다가 최근 4년 F1을 석권한 레드불이 과거 재규어 시절에는 중위권, 혹은 중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영원한 승자가 없는 무대’에서 오늘 최하위를 차지한다고 무조건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자우버나 토로로쏘, 포스인디아 등 중소독립 팀들이 매년 한 순위씩 순위를 끌어올리며 언젠가는 최강 팀이 되고 말겠다는 언더독의 마음가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F1 팬들이 우승 한 번 하지 못하는 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올 시즌 레드불에서 베텔을 압도하며 엄청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다니엘 리카도는 이런 소형 팀들의 존재 의의에 대해 드라이버 입장에서 좋은 이야기를 남겼다. 챔피언을 꿈꾸는 재능 있는 드라이버들 모두가 상위권 대형 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도 없고, F1의 공기와 흐름을 배워야 하는 어린 드라이버들은 최하위권의 소형 팀으로도 충분하다는 얘기였다. 늘 스타팅 그리드의 맨 뒤에서 레이스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갈 희망을 키우고, 승리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이 리카도의 이야기였다.
참가하는 드라이버의 숫자가 극히 제한적인 F1 무대에서 리카도가 언급한 것처럼 드라이버의 등용문 역할로 보더라도 중소 팀의 존재 의의는 충분하다. 대형 팀 역시 그리드를 채우는 것뿐 아니라 함께 파이를 키우고 안정된 인력 풀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중소팀이 필요하다. 중소팀은 엔진을 포함한 파워 유닛과 여러 기술 분야에서 대형 팀의 고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마루시아와 자우버가 무너진다면 페라리는 파워 유닛을 소비할 팀이 없어지고 결국 자신들의 파워트레인과 관련된 비용 부담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중소 상공인을 무너뜨리는 것이 대기업에게 전혀 득 될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버니
일부 소식통에 의하면 자우버, 포스인디아, 로터스의 경우 미국 그랑프리 레이스가 펼쳐지기 90분 전까지 보이콧이라는 극단적인 대응을 막기 위해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중소 독립 팀들은 F1 수프리모 버니 에클스톤과 FOM에게 중소 팀 몰락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이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을 경우 스스로에게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내민 셈이었다. 결국 버니 에클스톤은 현재의 중소 팀 재정 위기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했다.
시작은 수익 분배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다섯 개의 대형 팀, 레드불, 페라리, 맥라렌, 메르세데스, 윌리암스(윌리암스의 2013시즌 순위는 11팀 중 9위였다. )가 전체 수익의 63%를 나눠 가졌고, 나머지 여섯 팀이 37%를 분배 받았다. 이 중 페라리와 메르세데스는 대형 자동차 제조사의 팩토리 팀이고, 맥라렌과 윌리암스는 다방면의 사업을 펼쳐 흑자가 나는 기업으로 성장한 대형 팀이다. 레드불은 말이 필요 없는 세계 최대의 에너지 음료 기업이다.
결국 수익 배분이 절실한 작은 독립 팀들이 아니라 뒤가 든든한 큰 손들이 수익도 많이 가져간 셈이었다.
미국 그랑프리가 끝나고 며칠 사이 들려온 다른 소식들에 의하면 중소 독립 팀과 FOM, 그리고 F1의 최대 지분을 가지고 있는 CVC 캐피털 사이에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루머에 의하면 CVC 캐피털이 중소 팀들에게 최대 각 1억 파운드(한화 약 1,700억원 )를 지원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물론 구조적인 콩코드 협정의 재협상이 없다면 단편적인 자금 지원은 미봉책에 불과하겠지만, 일단 이 정도로라도 심각한 재정난에 빠진 중소 독립 팀에게는 숨통이 트일 대책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열쇠는 버니 에클스톤이 쥐고 있다. 자신이 책임을 인정한만큼 어떤 조치든 취해야 할 것이다. 대형 팀들에게 지분을 조금만 나눠주자고 부드럽게 요청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니처럼 하나의 목표가 있을 때 이를 어떻게든 달성해내고, 협상에서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인물이 필요하다. F1에 위기를 가져온 것이 버니였다면, 그 위기를 해결하는 대안도 버니여야 한다. 좋든 싫든 그의 활약을 기대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F1에서 페라리 등 전통의 팀들이 차지하는 역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또한 대형자동차 제조사의 적극적인 관심과 투자가 없다면 F1은 존립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서너 개의 대형 자동차 제조사와 페라리만 남아 있었다면 F1이 현재와 같은 인기와 지명도를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네 다섯 팀, 적게는 세 팀의 팩토리 팀이 전부인 메이저 모터스포츠 이벤트들의 인기가 어떻게 시들해졌는지를 생각하면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낼 수 있다.
언더독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젊은 드라이버들의 등용문 역할까지 해준,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중소 독립 팀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F1이 지켜졌다. 그리고, 그 중소 독립팀들은 지금 최악의 재정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대기업만 살고 서민이나 중소 상공인을 내팽개치는 사회는 붕괴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중소 독립 팀을 살리지 않는다면 F1의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