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그랑프리를 본 경험이 많지 않은, 게다가 모터스포츠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면 레이스에서 세이프티카의 등장은 상당히 당혹스런 시스템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열심히 달리면서 간격을 벌이던 드라이버들이 한 순간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속도를 늦추고 나란히 달리게 되는 상황이나, 한 술 더 떠서 순간적인 핏스탑 선택 여부에 따라 순위가 싹 바뀌는 상황은 잘 모르는 이들에겐 상당히 당황스럽게 느껴질 만 하다.
세이프티 카 상황만으로도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비까지 내린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그나마 계속 비슷한 세기로 비가 내린다면 안정된 웻 컨디션에서의 레이스가 이어지겠지만, 비가 내리다가 그치거나 드라이 컨디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경우 훨씬 더 골치 아픈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안전이 담보되기만 한다면’ 비와 세이프티카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상황은 다양한 변수를 레이스에 더해주면서 종종 아주 재미있는 레이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일단 세이프티카 상황으로 이전까지의 레이스 진행 상황 중 상당 부분이 무의미해지는 부분에 대해서 짚어보자. 누가 가장 빠른지 겨루는 것이 레이스라는 전제 하에 세이프티카라는 시스템은 직접적으로 레이스의 본질과는 맞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레이스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F1은 그저 잠깐 동안 누가 빠른가 하는 ‘기계적 성능을 비교하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F1은 가솔린 자동차의 탄생과 함께 태동한 그랑프리 레이싱의 친자다. 그리고 처음부터 온/오프로드를 가리지 않고 장기간 ‘내구 랠리’를 펼치는 듯 했든 초창기 자동차 경주의 흐름을 이어받아 그랑프리 레이싱은 상당히 오랜 시간 트랙을 달려 승부를 겨루는 형태를 띄었다. 애초에 몇 초 만에 승부가 결정되는 드래그 레이싱이나 랩 타임으로 승부를 겨루는 타임 어택과 달랐다. 그저 단순하게 어떤 차의 단기간 성능이 좋은지 알아보는 것이 F1의 본질이었다면 경기 시간은 2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평균 100분 이상, 때로는 두 시간이 소요되는 F1 그랑프리의 레이스 시간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300 km의 긴 거리를 달려야 하고, 그 동안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대부분 30분 이상 걸리지 않는(그 중 다수는 20분 이내에 결과가 나오는) 대부분의 모터스포츠 이벤트를 생각하면 F1 그랑프리는 거의 내구 레이스처럼 느껴진다. 단기간의 주행과 달리 100분 이상의 레이스에서는 수많은 변수가 더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세이프티카도 그런 변수 중 하나다.

세이프티카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레이스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드라이버의 안전과 트랙 마샬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보다 중요한 임무는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이프티카는 레이스의 향방을 바꾸어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선두를 달리는 드라이버가 압도적으로 2위와 격차를 벌여 놓았더라도 세이프티카가 나오면 의미가 없어진다. 세이프티카 상황에서 핏 스탑을 한 드라이버와 그렇지 않은 드라이버의 차이가 생기고, 다수가 핏스탑을 선택하는 세이프티 카 상황 직전에 핏스탑을 한 드라이버가 있다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이프티카의 도움을 받아 우승을 차지한 드라이버라고 해서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운이 좋았다’는 평가가 더해지기는 하겠지만, 결코 세이프티카 상황에서의 운만으로는 우승까지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우승을 위해서는 트랙에 세이프티카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판단, 다른 드라이버들의 전략이 어떨 것인가에 대한 판단, 그리고 서로 다른 전략이 선택됐을 때 이를 수행하는 능력들이 모두 필요하다. F1이 드라이버 한 명이 아닌 수 백 명의 팀원이 함께하는 팀 스포츠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4 헝가리 그랑프리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레드불의 리카도나 2위를 차지한 페라리의 알론소도 모두 이런 팀 스포츠로서의 요소가 빛났다. 두 드라이버는 모두 첫 세이프티카 상황에서 많은 손해를 봤지만, 조금은 극단적인 전략의 선택과 꼭 필요할 때 추월에 성공한 드라이버의 역량이 어우러지면서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다. 반면 세이프티카가 없었다면 여유 있게 우승을 차지했을 것으로 예상됐던 로스버그의 경우 첫 세이프티 카 상황에서 큰 손해를 봤지만 포디엄 피니시에 실패한 것을 세이프티카 상황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첫 레이스 리스타트 후 알론소는 물론 베뉴에게까지 순위를 내준 것이 로스버그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로스버그가 우승을 놓친 계기처럼 세이프티 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최소한 팬들에게는’ 훨씬 재미있는 레이스를 제공하고 종종 명 경기를 연출하게 하는 것이 비의 역할이다. 드라이 컨디션, 즉 마른 노면이었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들이 펼쳐진다. 노면이 완전히 말라 있었다면 로스버그가 브레이킹에 실패했을 확률도 훨씬 적어진다. 역사 속의 수많은 명 경기가 이와 같은 비와 세이프티카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졌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비가 내리더라도 경기는 지속된다. 간혹 비가 많이 내려 레드 플랙이 선언되고 매우 드물게 레이스가 그대로 끝나버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는 레이스를 흥미 진지하게 만들면서 많은 변수를 제공한다. 아무리 웻 컨디션에 대비를 잘한 드라이버라 하더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트랙 상황에 모두 완벽히 대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친근한 예로 2010 코리아 그랑프리의 경우도 비와 세이프티카가 큰 변수가 되었다. 너무 많은 비 때문에 레드 플랙이 한 시간 가량 발령된 것은 큰 악재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후 빗 속에서 펼쳐진, 그리고 트랙이 조금씩 말라가면서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이어진 것은 매우 긍정적인 요소였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고 세이프티카가 나오지 않았다면 대회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레이스에 대한 평가도 매우 박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늘이 도왔다고도 할 수 있는 레이스였다.
굉장히 재미 없는 레이스로 정평이 나 있는 그랑프리에서도 비와 세이프티카는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난 주 이슈가 되었던 헝가리 그랑프리다. 헝가리 그랑프리는 사고 빈도도 낮고 드라이 컨디션에서 추월이 매우 어려운 곳으로 악명이 높다.
때문에 팬들의 관심도 낮고 흥미가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2006년 처음으로 헝가로링에 비가 내리자 20년간 묵은 체증이 한 번에 씻겨 내려갈 듯한 흥미진진한 레이스가 펼쳐졌다. 최근 재미있었던 헝가리 그랑프리로 손에 꼽는 2006, 2011, 2014년의 레이스가 모두 웻 컨디션의 영향을 받았고, 이 중 더 재미있었던 2006년과 2014년에는 세이프티카가 등장했다.

물론 비와 세이프티카가 최적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면 레이스가 중단 되어버리므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고, 너무 오래 내리는 것 역시 오히려 지루한 레이스를 만들 수 있다. 2011 캐나다 그랑프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 경기를 연출했지만, 2시간이나 이어진 긴 레드 플랙 시간만큼은 큰 오점으로 남았다.
결국 비가 내릴 것, 적당히 내릴 것, 세이프티카가 등장할 것, 너무 자주 등장하지 말 것, 적당한 타이밍에 등장할 것 등이 비와 세이프티카의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는 까다로운 전제 조건이 된다. 사고 상황이 레이스에 흥미를 더해줄 수 있지만, 부상까지 이어질 수 있는 큰 사고나 처리가 너무 오래 걸리는 사고, 너무 잦은 사고는 오히려 흥미를 반감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쨌든 운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비와 세이프티카는 F1 팀이라면 반드시 대비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 대상이다. 아무리 비가 내리고 세이프티카가 등장했다고 해도 결국은 강팀이 앞에 서고 약팀이 뒤로 밀린다는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내세울 것이 하나라도 있는 팀과 드라이버의 경우에만 운의 도움을 받아 우승이나 포디엄에 도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카라치올라, 세나, 슈마허로 이어지는 빗길에 강한 드라이버들이 최고의 드라이버로 각광 받는 것 역시 웻 컨디션이 단순한 운의 요소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대부분의 다른 스포츠가 그렇듯, F1에도 수많은 운의 요소가 작용한다. 좋은 팀에 속하는 것도 운이고, 자신의 스타일과 잘 맞는 차를 타게 되는 것도 운이다. 퀄리파잉의 결정적인 핫 랩에 브레이킹 포인트에서 범프를 밟지 않는 것도 운이고, 레이스에서 백마커와 부딪혀 리타이어하지 않는 것도 운이다. 지난해 우승 팀으로 이적했는데 올해는 전혀 경쟁력이 없는 상황이 되는 것도 운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비확정적인 요소를 뚫고 단 하나의 레이스라도 우승을 차지하는 것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비와 세이프티카는 때로는 레이스를 망쳐버리기도 하지만, 가끔은 절묘한 타이밍에 조화를 부리며 쉽게 보기 힘든 재미있는 경기를 만든다. 일부에서는 이런 재미있는 경기 결과에 불만을 토하고 운으로 얻은 결과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불평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에 공평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F1에서 이 정도의 운이 따른다 해서 또 얼마나 문제가 있겠는가? 아무리 많아도 한 시즌 2/3 이상의 레이스에서는 비 구경을 하기 힘든데, 가끔 라이트 팬이 즐거워할만한 혼전 한 두 번 정도 섞여 주는 것이 재미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