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찬 베텔이 네 번째 F1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2013 시즌은 팀메이트
마크 웨버에게는 마지막 F1 시즌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스포츠에서 챔피언이 주목 받는
것이 당연하듯 모터스포츠에서도 스포트라이트가 챔피언에게 쏟아지는 것은 마찬가지고,
베텔이 슈퍼스타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웨버가 상대적으로 더 적은 관심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F1 드라이버
로서의 커리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챔피언은 승자로서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하지
만,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의미 있는 기록들을 쌓고 팬들에게 ‘최고의 드라이버’로 기억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어떤 F1 드라이버들은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면서도 챔피언보다 더 오래 기억되고 더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F1의 ‘전설’로
추앙 받기도 한다.
▲ 스털링 모스와 그의 이름을 딴 메르세데스-벤츠 SLR 스털링 모스
F1 초창기의 영웅 중 한 명이었던 스털링 모스가 그런 ‘전설’ 중 한 명이다. 스털링 모스는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영국 역사상 최고의 드라이버로 평가 받고 있다. 모두 열 명의 F1 챔피언을 배출한 영국에서 한 번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 스털링 모스를 최고로
평가한다는 것은 요즘의 F1 팬들에게는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세 차례나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한 재키 스튜어트나, 영국 역사상 가장 빠른 사나이였던 짐 클라크, 세계에
서 유일하게 모터스포츠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그레이엄 힐을 뒤로 하고 스털링 모스를 영국 최고의 드라이버로 꼽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챔피언 타이틀만이 전부가 아니
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스털링 모스는 열 시즌 동안 F1에서 활동하면서 시즌 종합 순위에서 네 차례의 2위와 3 차례의 3위를 차지했다. 1포인트 차로 타이틀을 놓친 1958 시즌을 포함해 모두 세 차례나 5
포인트 이내에서 챔피언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특히 1958 시즌 타이틀 경쟁자였던 마이크 호손이 실격 판정을 받았을 때,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마이크 호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해 7 포인트를 획득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스털링 모스는 6 포인트 차이로 챔피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은 대신 정정당당한 승부를 택했다. 문제의 사건으로부터 55년이 지난 지금 1958 시즌 챔피언 마이크 호손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챔피언이 되기에는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던 스털링 모스를 기억하는 사람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모터스포츠의 형태를 가리지 않고 경쟁에 나섰던 스털링 모스는 F1을 포함한 포뮬러 레이스, 스포츠 카 레이스, 랠리 등을 포함해 무려 496 회의 레이스에 참가했고, 이 중 366회의 레이스에서 완주에 성공했다. 놀랍게도 스털링 모스는 이 중 222 차례의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55년 이태리의 24시간 내구 레이스 밀레 밀랴 에서 722번을 단 메르세데스-벤츠 300 SLR로 거둔 기록적인 우승은 2003년 메르세데스와 맥라렌이 합작한 SLR 맥라렌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SLR 맥라렌의 첫 버전 업과 함께 ‘722’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고, 2009년 한국인 디자이너가 참여해 화제가 되었던 마지막 SLR 맥라렌은 아예 ‘스털링 모스’라는 이름을 달기도 했다.
▲ ‘샴페인 세레머니’를 처음 선보인 댄 거니
영국 출신의 F1 드라이버 중 스털링 모스가 무관의 제왕이었다면, 미국 출신의 F1 드라이버 중에는 댄 거니라는 전설적인 드라이버가 있었다. F1의 역사에서 챔피언의 이름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고, 시대를 같이하며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드라이버들과 비교했을 때 댄 거니의 성적은 조금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10 시즌 동안 86회의 F1 레이스를 펼친 댄 거니가 거둔 성적은 세 차례의 폴 포지션, 19 차례의 포디엄 피니시, 그 중 네 차례의 우승이 전부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지닌 댄 거니 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페라리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로 기량을 펼칠 기회가 없었고, BRM에서는 거의 모든 레이스에서 완주가 어려울 정도로 차량의 신뢰도가 떨어졌다. 포르쉐의 F1 레이스카는 너무 느렸고, 이후에도 경쟁 드라이버들이 조금 더 빠르거나 조금 더 경쟁력 있는 레이스카를 보유했다. 결국 댄 거니는 스스로 F1 팀을 만들어 세 시즌 동안 활동하기도 했는데, 1967년 벨기에 그랑프리의 우승은 역사상 유일한 미국 팀 소속 미국 드라이버의 F1 그랑프리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댄 거니는 F1 외에도 인디카와 나스카, 캔암 레이스 등에서 활약하면서 차종과 레이스 특성을 가리지 않고 항상 빠른 모습을 보이면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재능에 비해 F1에서 실적이 따르지 않았던 댄 거니 였지만, 그는 F1과 모터스포츠 전체에서 분명한 족적을 남겼다. 댄 거니는 포르쉐가 F1 팀을 운영하면서 거둔 다섯 차례의 포디엄 피니시를 모두 혼자 책임졌으며, 1962년 댄 거니의 프랑스 그랑프리 우승은 포르쉐의 처음이자 마지막 F1 그랑프리 우승이 되었다. 댄 거니는 1967년 르망24시간에 포드 GT40으로 참가해 우승한 뒤 포디엄에서 처음으로 샴페인을 뿌리는 장면을 연출했고, 댄 거니가 언론을 향해 샴페인을 뿌렸던 해프닝은 이후 ‘샴페인 세레머니’로 모터스포츠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다. 또한 댄 거니는 엔지니어적인 재능을 발휘해 최초로 윙의 끝부분에 직각을 이루는 작은 플랩을 붙이는 ‘거니 플랩’이란 아이디어를 도입했고, 현재까지도 레이스카의 윙은 물론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날개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 스웨덴 외레브로에 위치한 로니 페터슨 박물관 앞의 로니 페터슨 조형물
1950년대에 스털링 모스, 1960년대에 댄 거니가 있었다면, 1970년대에는 로니 페터슨이라는 걸출한, 그러나 챔피언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던 드라이버가 있었다. 스웨덴 출신의 로니 페터슨은 드라이빙 스킬 로만 따졌을 때 챔피언 타이틀을 갖지 못한 것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드라이버였다. 하지만 로니 페터슨은 비즈니스적으로는 그다지 뛰어난 재능을 갖지 못했고, 덕분에 많은 경우 경쟁력 있는 레이스카에 오를 기회가 없었다. 경쟁력 있는 레이스카에 올랐을 때는 정치적으로 교활하지 못했고, 아무 말 없이 팀을 위해 희생한 경우도 많았다. 아쉽게도 많은 경우 로니 페터슨의 레이스카는 신뢰도에 문제가 있었다.
‘슈퍼 스웨드’로 불리던 로니 페터슨은 아홉 시즌 동안 F1에서 경쟁하면서 14 차례의 폴포지션과 10승의 성적을 거뒀다. 두 차례나 시즌 종합 포인트 순위 2위에 올랐고, 한 차례 3위를 차지한 로니 페터슨은 1973 시즌의 경우 폴 포지션을 차지했던 레이스 중 네 차례나 리타이어하는 등 운이 따르지 않았다. 당시 로터스에서 에머슨 피티팔디와 팀메이트를 이뤘던 로니 페터슨은 완주한 레이스 중 두 차례를 제외한 일곱 차례나 포디엄에 올랐고 이 중 네 차례는 우승을 거뒀지만 포인트에서 뒤져 시즌 종합 3위에 그쳤다. 1975 시즌부터는 로터스가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해 1976 시즌에는 시즌 중 팀을 옮기는 어수선한 상황도 겪어야 했다.
1978 시즌은 동료 드라이버들에게 가장 빠르다고 인정 받았던 로니 페터슨에게 비극적인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2년 만에 돌아온 로터스에는 마리오 안드레티가 퍼스트 드라이버로 자리잡고 있었고, 로니 페터슨은 세컨드 드라이버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여야 했다.
1978 시즌은 로니 페터슨의 커리어 중 처음으로 모든 면에서 경쟁력 있는 레이스카가 주어진 시즌이었지만, 로니 페터슨은 여러 차례 마리오 안드레티에게 영광의 자리를 내줘야 했다. 진정한 비극은 이태리 그랑프리에서 찾아왔다. 오전 웜업에서의 브레이크 파손과 사고 때문에 구형 레이스카로 스타팅 그리드에 섰던 로니 페터슨은 스타트 직후 큰 사고에 휘말렸다. 제임스 헌트 등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구급차의 도착이 늦었고,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듯 했지만 로니 페터슨은 다음날 숨을 거뒀다.
▲ 마지막 ‘올드 스쿨’ 드라이버로 평가 받는 질 빌너브
로니 페터슨은 가장 원초적인 드라이버로서의 자질 면에서 최고로 평가 받았지만 기술적인 변화와 비즈니스가 개입된 F1의 새로운 시대와는 잘 맞지 않았고, 그와 같은 ‘올드 스쿨’ 드라이버는 점차 F1과 모터스포츠에서 사라져갔다. 1970년대 말부터 짧게 빛났던 질 빌너브라는 캐나다 출신의 드라이버는 사실상 마지막 올드 스쿨 드라이버였다. 순수하게 드라이빙을 사랑하고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만을 생각하던 질 빌너브는 그랑프리 기간 중 호텔을 마다하고 모터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등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정을 보였다.
짧았던 맥라렌에서의 F1 데뷔를 지나 풀 타임으로 F1에서 활약한 다섯 시즌 동안 페라리의 레이스카에만 오른 질 빌너브는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스피드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경쟁이 붙었을 때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복잡하게 계산하는 대신 오직 빠르게 달리는 것만을 생각했다. 특히, 몬트리올 엑스포와 올림픽 부지에 새로 만들어진 노틀담 서킷에서 처음 펼쳐진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면서 홈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기도 했다. 경쟁력 있는 레이스카가 주어졌던 첫 시즌이었던 1979 시즌, 로니 페터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팀의 퍼스트 드라이버를 위해 세컨드 드라이버의 역할만 수행하지 않았다면 챔피언 타이틀은 질 빌너브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경쟁력 없는 레이스카가 주어졌던 두 시즌을 지나 다시 한 번 경쟁력 있는 레이스카가 주어졌던 1982 시즌이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는 점도 로니 페터슨의 경우와 비슷하다. 팀메이트 디디에 피로니와의 불화로 산마리노 그랑프리 우승을 놓친 질 빌너브는 이어진 벨기에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 팀메이트의 기록을 앞서기 위해 서둘러 트랙에 나섰지만, 느리게 달리던 요헨 마스와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캐나다인들 뿐 아니라 많은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사랑 받았던 질 빌너브는 통산 6승의 기록을 남기고 더 이상 F1레이스카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노틀담 서킷이 질 빌너브 서킷으로 이름이 바뀌고 그의 정신을 기리는 많은 이들의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질 빌너브의 이름은 가장 뜨거웠던 페라리 드라이버이자 순수하게 레이스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지금까지 널리 기억되고 있다.
스털링 모스와 댄 거니가 그랬고, 로니 페터슨과 질 빌너브가 그랬던 것처럼, 또 이 자리에 언급하지 못했던 다른 많은 전설적인 드라이버들이 그랬던 것처럼,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 드라이버들의 이름 역시 F1과 모터스포츠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고 많은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드라이들보다, 오히려 이들처럼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위대한 족적을 남긴 드라이버들이 더 높게 평가 받는 경우도 많다. 현재 F1에서 활약하고 있는 다섯 명의 챔피언들도 분명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지만, 웨버처럼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은퇴하는 드라이버들 중에도 훗날 챔피언 이상의 위대한 드라이버로, 전설처럼 기억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