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환의 캠핑폐인] 낮잠

[김산환의 캠핑폐인] 낮잠

발행일 2011-07-05 10:13:45 김산환 칼럼리스트

바람이 이마를 살짝 치고 간다.
가볍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잠깐 흔들린다.

달궈진 공기가 시속 1km의 속도로 다가온다.
달짝지근하다.
혀로 침을 굴리며 입맛을 다신다.

등줄기에 땀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서늘하다.
모로 누워 등짝을 넌다.

나뭇잎이 눈에 아른 거리다.
눈부시다.
실눈을 뜨고 오후 햇살을 째려본다.

얼마나 잤을까. 책을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등짝이 흥건하게 땀이 뱄다. 오후 햇살도 퍽이나 깊어졌다. 나무의 그늘이 텐트에 내려앉았다. 솜씨 좋은 화가가 붓으로 난을 친 것처럼 나뭇잎과 가지의 그림자가 선명하다. 그 중 몇 잎은 내 얼굴에도 물들었다.

나를 제어하는 모든 감각기관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조금은 몽롱한 시간. 의식의 절반은 끈을 풀어놓은 채 풀린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달콤하다. 이렇게 넉넉하게 낮잠을 자본 게 얼마만인가. 나는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온몸을 칭칭 동여맸던 긴장의 끈을 모두 풀고, 오늘 딱 하루만이라도 휴식을 허락하고 싶었다.

코 흘리게 시절, 들일하는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다니곤 했다. 나는 술심부름을 할 때마다 막걸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주전자 꼭지를 물고 한 입 빨면 시원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던 그 찌릿찌릿한 느낌을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술기운에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난 뒤 다시 목울대를 타 넘어오는 달콤한 맛까지도.

그날도 홀짝홀짝 주전자 꼭지를 빨았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한 모금 빨고, 논두렁을 걸어가다 한 모금 빨고, 산모퉁이에 선 밤나무 그늘을 지나다 한 모금 빨고…. 그렇게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아버지가 일하는 밭까지 갔다. 아버지는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전자에 술이 왜 절반뿐이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서둘러 자리를 떴다.

취기가 올라왔다. 두 걸음 떼기가 무섭게 딸꾹질이 났다. 논두렁을 걷는 걸음이 위태로웠다. 한 번은 발을 헛디뎌 논물에 빠졌다. 그 때 진창에 박힌 고무신을 빼낸다고 힘을 쓰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논두렁이 벌떡벌떡 일어섰다. 한 순간 땅이 옆으로 섰다. 나는 몸을 가누려고 토끼풀 위에 잠시 머리를 기댔다.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눈꺼풀이 연극이 끝난 무대의 커튼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자위를 덮었다.

눈을 떴다. 풀 비린내가 훅 끼쳤다. 여기가 어디지? 알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누웠다.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술심부름을 하다 막걸리를 마셨고, 아버지에게 술 마신 것을 들킬까봐 서둘러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논두렁을 건너다 너무 어지러워 잠시 강둑의 풀밭에 누웠다. 그럼 여기는?

어디선가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힘을 내어 몸을 일으켰다. 팔뚝에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가 화들짝 놀라 날아갔다. 세상은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 렌즈처럼 뿌옇게 보였다. 정신이 들기까지 한 참을 멍 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누워 있던 자리의 풀은 푹 꺼진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비틀거리며 강둑으로 올라섰다. 얼마나 잔 것일까. 황우재 너머로 붉은 노을이 걸렸다. 오후 내내 풀밭에서 잠을 잔 것이다. 들녘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사리를 하던 사람들도 다 돌아간 모양이었다. 저녁마다 강변으로 소를 몰고 와 풀을 뜯기던 아이들도 없었다. 그 넓은 들에 나 혼자였다.

갑자기 무섬증이 일었다. 나 홀로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헛헛함이 몰려왔다.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발이 허공 위를 걸었다. 고무신 한 켤레가 훌러덩 벗겨졌다. 뛰던 걸음을 멈추고 고무신을 주었다. 나머지 고무신마저 벗어들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소리쳐 엄마를 불렀다.

집에 닿았을 때는 숨이 턱밑까지 찼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전했다. 엄마가 있어야 하는데…. 엄마를 만나면 꼭 끌어안고 응석을 부리려 했는데…. 마루에 벌렁 누웠다. 서까래에 붙은 벌집에서 장수벌이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나누는 대화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깼다. 아버지는 술을 주전자에 절반 밖에 안 보냈냐고 엄마를 타박했다. 엄마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항변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이대로 잠드는 게 나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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