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환의 캠핑폐인] 봄볕, 화이트 와인, 그리고 휴식

[김산환의 캠핑폐인] 봄볕, 화이트 와인, 그리고 휴식

발행일 2011-05-17 11:46:49 김산환 칼럼리스트

캠핑장에 뛰노는 아이의 그림자가 거인처럼 커졌다. 서편 하늘에 감색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아이스박스에서 오후 내내 차갑게 식혀놓았던 화이트 와인을 꺼내 코르크 마개를 땄다. 딸기와 앵두, 치즈를 바른 비스킷도 테이블에 올렸다.

와인을 따랐다. 투명한 와인 잔에 싱그러운 기운이 넘쳤다. 그 잔을 눈높이로 들었다. 잔속에 초록이 깊어지는 숲이 들어왔다. 잔을 좀 더 높이 들었다. 파란 하늘이 잔속으로 내려앉았다. 와인 속에 비친 세상, 완연한 봄이었다.

와인에 깃든 봄을 한 모금 마셨다. 풀 비린내처럼 상큼한 와인의 향기가 입 안 가득 퍼졌다. 내가 사랑하는 향기다. 내가 가장 꿈꾸는 행복한 캠핑의 순간이다. 나는 코 속 깊이 와인의 향기를 빨아들였다. 그 향기를 따라 보르도의 포도밭에서 파티를 즐겼던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프랑스 최고의 와인산지라 불리는 보르도. 지롱드 강에 자리한 샤또 루덴의 포도밭에 오렌지빛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가 가까워지자 낮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오후 8시를 눈앞에 뒀는데도, 햇살에는 아직 힘이 넘쳤다. 그 햇살을 받으며 포도밭에는 포도가 알알이 영글고 있었다.

나는 지롱드 강 산책을 마치고 포도밭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강에서 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열 지어 서 있었다. 이 길을 파크 에비뉴라 불렀다. 100여 년 전에는 이 길이 샤또 루덴에서 만든 와인이 세상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오크통을 굴려서 강에 정박한 배에 실었다고 한다. 와인을 실은 배는 지롱드 강을 빠져 나가 유럽의 각국으로 프랑스의 향기를 전했다.

포도밭 건너편에 젊은 친구 몇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샤또 루덴이 젊은 여행자에게 초지를 무료로 개방해주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다시 보르도를 방문한다면 저들처럼 캠핑을 하며 와인을 원 없이 마시리라. 그러나 그날은 아니었다. 그날은 샤또 루덴의 성주가 만찬을 베풀고 성에서의 하룻밤 잠자리도 허락한 터였다.

햇살은 더욱 짙어졌다. 샤또 루덴의 회색벽돌로 지은 성도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포도 잎도 밝은 연둣빛으로 빛났다. 찬란한 유월의 저녁 햇살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처럼 화창한 봄날을 언제 만났을까.

성과 포도밭 사이에 있는 정원에서 누군가 와인 잔을 들어보였다. 아페리티프를 즐길 시간이 됐다는 신호다. 나는 산책을 접고 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보르도의 이름난 샤또에서 와인을 마시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르기 몇 주 전부터 그런 상상을 하며 잠을 설쳤다.

탁자에는 차갑게 식힌 화이트 와인이 놓여 있었다. 샤또 루덴의 성주가 와인을 따랐다. 와인 잔을 들어봤다. 푸른 포도밭과 투명한 하늘이 와인 잔에 담겼다. 와인은 떼루아를 담는다더니, 이 게 그런 것일까.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지롱드 강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강바람이 느껴졌다. 청포도를 송이채로 씹는 기분이었다. 시원했다. 깔끔한 산미가 넘쳤다. 맑고 투명한 보르도의 공기를 들이켠 기분이었다.

그때 누군가 왔다. 성주와 친구 사이라는 라퐁 로쉐의 주인장 미셸 테스롱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길이라고 했다. 그가 오자 로제 와인 두 병이 더 나왔다. 그는 자신은 로제 와인을 빚지는 않지만 싱그러운 유월에는 로제 와인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것도 샤또 루덴 것이 최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와인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라퐁 로쉐에 대해 잘 알 것이다. 보르도의 특급 와인을 등급별로 나눈 그랑크뤼 와인에서 4등급을 받은 샤또다. 꼬냑 생산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기 테스롱이 1959년 포도밭을 매입한 후 지금과 같은 명성의 반열로 일궜다. 라퐁 로쉐는 적어도 병당 10만원을 호가한다. 그런 명품 와인을 만드는 샤또의 소유주가 이웃 샤또의 파티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차림새가 너무나 평범했다. 내가 상상했던, 그림 같은 성의 성주답게 귀티가 흐를 것이라는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방금 포도밭을 돌보다 온 농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를 더욱 친근하게 만든 작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절반쯤 열린 바지의 지퍼였다. 직업의식에 충실한 그가 방금 따른 로제 와인 잔에 코를 대고 진지하게 향을 맡을 때도 그의 바지 지퍼는 열려 있었다.  

그의 바지 지퍼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가 입은 바지의 지퍼가 열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가며 재치 있는 입담으로 좌중을 사로잡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열린 그의 바지 지퍼로 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그 사실을 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바지의 지퍼를 열어놓은 채 파티를 즐겼다.

나는 그날 보르도의 진정한 농부들을 봤다. 우리가 격식에 사로잡혀 유난스럽게 마시는 와인. 그러나 그것을 만드는 프랑스의 농부들은 소탈했다. 꾸밈이 없었다. 그들은 햇살 좋은 마당에서 자신이 담근 와인 한 잔 나누는 기쁨으로 와인을 빚고 있었다. 설령, 누군가의 허물-그것이 열린 바지 지퍼라고 해도-을 발견해도, 스스로 그것을 해결하기까지 기다릴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들이었다.

캠핑장에서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저무는 하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날, 지롱드 강이 내려다보이는 샤또 루덴의 포도밭에서 느꼈던 행복이 되살아난다. 알알이 포도를 영글게 하던 보르도의 오렌지빛 햇살과 강에서 불어오던 선선한 바람, 자갈이 듬성듬성 박혀 있던 밭에서 나던 풋풋한 흙내음이 느껴진다. 화창한 봄날의 늦은 오후, 화이트 와인을 마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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