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잡지사에 입사하던 날, 잘 부탁한다면 악수를 건네는 손길이 뭔가 허전했다. 내 눈길이 아래로 쏠렸다. 그의 손가락이 세 개였다. 새끼손가락과 약지손가락이 없었다. 눈길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싱끗 웃었다.

 

 

 그와는 자주 파트너가 되어 취재를 다녔다. 등산 전문잡지다 보니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힘든 산행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었지만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흘렀다. 내가 오름길에 지쳐 숨을 헐떡일 때도 보채는 일 한 번 없었다. 그저 뒤에서 묵묵히 선 채로 숨을 조절할 뿐이었다. 그는 세 개의 손가락으로도 무거운 카메라를 잘도 움켜쥐었다. 정상인인 내가 잡아도 휘청할 만큼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길을 뛰어다니며 사람과 산을 앵글에 담았다. 손이 곱아드는 겨울, 꽁꽁 언 가죽 등산화의 끈을 조이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는 그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는 씩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손가락에 얽힌 사연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사연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자칫 그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쩌다 둘이 야영을 할 때면 손가락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냐는 질문이 목청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참았다. 그가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손가락에 대한 사연을 들은 것은 그가 아닌 그의 후배로부터였다.

그가 손가락을 잃은 것은 대학산악부 시절이었다. 봄볕이 좋던 어느 날, 그는 산악부 선후배들과 대구 팔공산으로 암벽등반을 하러 갔다. 선배가 먼저 등반을 했고, 그는 확보를 봤다. 혹시라도 선배가 추락하면 줄을 잡아 그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선배가 추락한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일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이 하늘로 붕 떴다. 선배가 추락하는 충격이 그대로 그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의 몸은 내동댕이쳐지듯 바위에 부딪혔다. 순간 그는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은 자일을 움켜쥔 손에서 뻗쳐왔다. 그가 바위에 부딪힐 때 자일을 움켜쥔 손이 먼저 부딪혔고, 선배가 추락하면서 급속하게 딸려나가던 자일이 그만 칼이 되어 그의 손가락을 자른 것이다.

그는 자일을 놓고 싶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그러나 놓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일을 놓는 순간 자일의 반대편에 매달려 있는 선배는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손가락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자일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서 들려오는 강한 주문에 따라 손에 온힘을 가했다. 그가 자일을 붙잡고 사투를 벌이는 동안 멍하게 바라보던 동료들이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었다.

그는 동료들이 자일을 단단하게 잡았을 때까지도 자일을 움켜쥐고 있었다.

두 개의 손가락은 그렇게 떠나갔다. 화가가 되고 싶던 미술학도의 꿈도 날아갔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뚝심 좋은 경상도 사내는 좌절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그는 붓 대신 카메라를 잡았다. 화폭에 담고 싶던 화가의 꿈을 카메라 앵글에 담기로 했다. 
 
손가락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난 뒤 한동안 그를 존경했다. 자일 파트너가 되면 생과 사를 함께 나눈다는 산 사나이들의 지독한 우정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았다. 말보다 항상 행동이 앞서는 이 우직한 사내의 사내다움에 매료됐다.

그러나 그 후로도 그는 한 번도 손가락 사연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그와는 일 년쯤 함께 일했다. 세상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들떠 있던 1996년 겨울. 그는 잡지사에 작별을 고했다. 사진을 더 배우고 싶다며 유학을 간다고 했다.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유학을 준비하려면 하루 이틀이 걸리는 게 아닐 텐데, 그는 그동안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입을 봉하고 있다가 작별인사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었다. 경상도 사내라더니.

그와의 인연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 세월이 족히 십년은 됐다.

풍문에 그는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맨이 되었다가 다시 작은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됐다고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여행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스쳐가는 바람처럼 우리는 헤어졌고, 또 얼마 동안은 연락도 없이 각자의 인생을 살아왔다. 어쩌다 그의 소식을 들으면 듬직한 어깨와 늘 허전하게만 보이던 그의 손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안부를 대신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새로 구입한 김에 전화번호를 정리하다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고 했다.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요즘도 산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끔 산에 가기는 하지만 요즘은 캠핑을 다닌다고 했다. 아이들이 생기고 난 뒤의 변화라고 했다. 시간이 되면 함께 캠핑을 가자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지금도 잡지사 시절 산에 메고 다니던 그 조그만 텐트를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어른 둘이 들어가면 딱 맞던 에코로바 5인용 텐트. 그 텐트에서 사내 다섯이 겨울잠에 들어간 뱀처럼 서로의 몸을 칭칭 감아 겨울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고약한 땀 냄새와 발 냄새로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온기가 그리워 서로의 몸을 난로 삼아 껴안고 자던 밤이 있었다. 그 텐트를 지금도 쓰고 있다고 했다. 젖은 장갑과 양말을 말리던 콜맨 휘발유 스토브와 짐승의 눈처럼 어둠을 훑던 페츨 헤드랜턴, 밥그릇도 되고, 커피 잔도 되고, 술잔도 되던 씨에라 컵을 지금도 쓰고 있다고 했다.    

나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캠핑이 상상이 됐다. 그가 친 작은 텐트 속에서 오순도순 사랑을 나누는 가족의 모습이 그려졌다. 세 개의 손가락으로도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 코펠을 닦는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그가 가진 것들, 추억을 제외하면 이제는 낡고 볼품없어진 그 캠핑 장비를 지금껏 소중히 갈무리하며 그만의 캠핑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젊은 날의 추억이 서린 그 텐트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와 술잔을 나누며 그의 허전한 손 이야기도 물어보고 싶었다. 이제 남의 눈치를 보거나 미안해하지도 않는 나이가 된 것을 핑계 삼아 젊은 날의 방황과 고뇌를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캠핑장에서 너무 많은 것을 누리려 하는지 모른다. 콘크리트 도시를 벗어나 자연의 품을 찾아간다고 외치면서도 사실은 문명의 이기와 편리를 그곳에도 넘치게 하려고 든다. 값비싼 장비가 캠핑 이력을 말해준다고 믿는 캠퍼, 명품에 열광하는 통속적인 인간군상을 캠핑장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곳에 과연 진정한 캠핑의 가치가 있을까.

 

 

가벼워지자.

조금은 부족하게 떠나자.

자연에 대한 갈망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 여기에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작은 텐트 하나면 충분하다고 여기자. 우리의 여장이 가벼워질수록 자연 속으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믿자.

 

김산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mountainfire@hanmail.net〉

관련기사

저작권자 © 탑라이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