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KINTEX에서 서울 모터쇼가 시작된 4월 첫 주, 지구 반대편 파리에서는 FIA가 중요한 발표를 했다. 올해부터 WEC, 즉 세계 내구레이스 챔피언십에서 그리드 걸을 퇴출하겠다는 내용의 발표였다. 이 말은 단일 경기로는 세계 최대의 모터스포츠 이벤트인 르망 24시간에도 그리드 걸이 나서지 않게 된다는 뜻이었다. 팬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 의미로’ 뜨거웠다.

F1 팬덤도 논란에 휩싸였다. FIA의 다음 행보가 F1일 것이라는 예측에 힘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은 매년 개선돼 왔고 올해는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관점에 따라 호 불호가 갈리고 논란이 되는 국내 모터쇼의 레이싱 모델 문제에 대한 입장과 묘하게 겹쳐 보이기도 한다. 자동차와 여성 모델 사이의 애매한 관계는 이제 더 이상 쉬쉬하고 넘어갈 문제로 남겨두기 힘들게 됐다.

▲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WEC의 그리드 걸

먼저 칼을 빼 든 FIA

FIA가 주관하는 두 번째로 큰 모터스포츠 챔피언십 시리즈인 WEC는 2015시즌 개막전인 실버스톤 6시간 레이스부터 그리드에 ‘그리드 걸’을 세우지 않겠다고 공식 확인했다. 메이저 모터스포츠로는 처음으로 WEC가 그리드 걸 퇴출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한 셈이다. 수십 년 동안 당연히 여겨졌던 그리드 걸이라는 개념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FIA의 이번 조치는 자동차와 모터스포츠에서 여성들의 입지를 구세대의 그것과 다르게 가져가야 한다는 여론 및 내부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기존 그리드 걸은 자동차와 레이스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상품화해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지적돼 왔다. 특히 잠재적 자동차 시장의 소비자인 여성 모터스포츠 팬이 갖게 될 수 있는 부정적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모터스포츠에선 그리드 걸, 일반 자동차의 홍보 면에서는 레이싱 모델이 성의 상품화 문제가 있다고 지적 받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다. 이견의 대립이 상당히 강한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논쟁 속에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에 대한 관점도 자연스럽게 변화해왔다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남성 고객’ 혹은 ‘남성 관객’을 유혹하기 위해 여성의 외모와 육체를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칼을 빼드는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술과 담배의 광고를 금지할 때의 상황 같은 느낌이다. 여성의 성 상품화가 문제긴 하지만 너무 깊게 뿌리내린 문제를 한 순간 잘못됐다고 금지시키는 것은 상당한 결단력을 요하는 문제였다. 자동차 산업과 모터스포츠의 중심에 다수의 여성이 진출한 현재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FIA가 칼을 빼든 것이다.

▲ 성의 상품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F1

아름답지 못한 F1의 과거

WEC에서의 그리드 걸 퇴출은 바로 F1 팬덤에 논쟁의 불을 지폈다. F1 팬들 중에는 즉각 F1 그랑프리에서 그리드 걸을 퇴출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강한 반면, 반대로 그리드 걸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주요 F1 매체의 칼럼니스트들도 하나 둘씩 그리드 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F1 챔피언십이 처음 시작된 1950년만 해도 그리드에 선 차량 앞에서 외모와 몸매를 내세운 여성 모델이 서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그리드 걸로 불리는 여성들은 F1에서 레이스가 펼쳐지기에 앞서, 그리고 포디엄 세리머니에서도 중요한 병풍 역할을 해왔다.

일부 몰지각한 사진 기자들은 차량과 레이스카는 아예 무시하고 그리드 걸만 프레임에 담기도 했다. 그리드 걸을 보라고 내세웠으니 그런 사람이 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65년의 역사 동안 단 다섯 명의 여성 드라이버에게만 기회를 줬던 F1은, 자신의 육체를 팔려는 그리드 걸에게는 넓은 문을 열어줘 왔다. 오래 동안 모터스포츠는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무대였고, 여성들은 언제나 들러리 취급을 받는 가운데 상품화된 여성의 육체만이 장식을 위해 활용된 것이다. 당연히 다방면에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시대 변화에 걸맞지 않게 F1이 여성을 다루는 방법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계속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단순한 사고와 남들도 다 그렇다는 무책임한 태도가 F1과 여성의 관계를 아름답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F1은 변화의 기로에 놓였다. F1을 주관하는 FIA가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상, F1의 바람직하지 못했던 과거의 관행은 수술대에 오를 날만 기다리게 됐다.

▲ 버니의 여성 F1 제안은 논란만 불러 일으켰다.

여성만의 F1, 가능할까?

최근 F1에는 여성의 영향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 열 팀의 F1 팀 중 두 팀을 여성이 대표자격으로 이끌고 있다. F1 팀에 많은 여성이 합류했고 미캐닉과 엔지니어 중에 여성의 비중도 늘고 있다. 수지 울프를 비롯해 카르멘 호르다, 시모나 이 실베스트로, 그리고 고 마리아 데 비요타까지 네 명의 여성이 지난 3년 사이 F1 레이스카를 몰았다. FIA가 추구하는 방향 그대로 F1에서 여성의 역할은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여성 F1 드라이버의 배출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다. 여성이 더 이상 남성 드라이버의 장식품이 아니고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위해서도 여성 F1 드라이버는 꼭 필요하다. 문제는 애초에 팜이 작은 여성 드라이버 중 탑 클래스에 근접한 여성 드라이버가 너무 적다는 점이다. 적은 수의 여성에게 돌아가는 기회가 제법 많더라도 결국 많은 남성 속에서 여성 F1 드라이버가 탄생할 가능성은 매우 작을 수밖에 없다.

F1의 지배자 버니 에클스톤은 지난 말레이지아 그랑프리에서 여성 드라이버만 참가하는 F1 레이스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이 아이디어는 카르멘 호르다 등 일부 여성에게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수지 울프 등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여성도 많았다. 대회의 창설 가능성을 뒤로 하고라도 과연 F1의 하위 대회격인 여성 전용 대회가 열리는 것이 여성의 비중을 높이고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분명한 것은 당장 여성 F1 레이스 등 갑작스런 해법이 나오지 않더라도, 여성이 더 이상 제3자로 취급 받지는 않게 하겠다는 생각에는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FIA가 그리드 걸 퇴출의 결단을 보였고, 구시대의 대표자격인 버니 에클스톤마저 여성에게 기회를 줄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많은 발전이 이뤄지긴 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더 멀다.

▲ F1 그리드 걸은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지게 될까?

좋든 싫든 시대는 변했다

과연 그리드 걸이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악습인가라는 문제만으로도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국가마다 사회마다, 조직과 문화마다 성과 성 역할에 대해서 100% 뚜렷하고 확실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오랜 시간 동안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자동차 문화 속에 여성의 역할을 새기는 일은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모터스포츠의 정점에 선 F1은 유독 시대의 변화에 뒤쳐지는 일이 많은 스포츠였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기는 어렵다. 좋든 싫든 자동차와 여성의 관계는 과거와 달라졌다. 이제 여성은 F1은 물론 모든 자동차 문화에서 주요 고객이자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성을 F1 레이스카와 드라이버의 병풍이자 장식품으로 삼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이미 WEC에서는 그리드 걸의 퇴출이 결정됐고, 다음 순서는 F1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꼭 바로 다음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F1에서 그리드 걸은 사라질 것이다. 많은 자본을 공급해서 F1을 먹여 살렸고, 그 자체로 멋있는데다가 홍보와 마케팅의 핵심이었던 술과 담배 광고가 금지됐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드 걸, 혹은 레이싱 모델이란 개념은 한 순간 사라져버리지는 않겠지만, F1을 비롯해 모터스포츠가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점차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윤재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jesusyoon@gmail.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탑라이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