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현지 시각 6월 13일 오후 3시부터 6월 14일 오후 3시까지 사르트에서 펼쳐진2015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포르쉐의 19번 차량이 우승을 차지했다. 닉 탠디와 얼 뱀버, 그리고 니코 훌켄버그까지 포르쉐 팀 내에서 가장 젊고 경력이 적은 멤버들이 번갈아 콕핏에 앉은 포르쉐 19번 차량은, 레이스 중반 선두로 나선 뒤 아우디의 강한 압박을 이겨내는 가운데 기나긴 레이스를 무난하게 관리해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다.

포르쉐가 아우디를 꺾고 17년만에 왕좌에 복귀한 것도 중요한 이슈였지만, 현재 포스인디아에서 활약 중인 ‘현역 F1 드라이버’ 니코 훌켄버그가 레이스 스타트와 라스트 드라이버 역할까지 도맡으며 우승의 1등 공신이 된 것이 가장 주목할만한 뉴스였다. 포르쉐의 원-투 피니시를 완성한 17번 차량에는 전직 F1 드라이버 마크 웨버가 탑승해 처음으로 르망의 포디엄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2015 르망 24시간은 한동안 서로 동떨어진 분야로 여겨졌던 F1과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포르쉐와 훌켄버그의 우승은 앞으로 F1과 프로토타입 스포츠카 레이싱의 미래에 많은 후폭풍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 2015 르망 24시간에서 우승을 차지한 포르쉐와 훌켄버그

르망 24시간의 역사를 다시 쓴 니코 훌켄버그

포르쉐와 훌켄버그의 2015 르망 24시간 우승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승리였다. 먼저 우승 팀 포르쉐는 지난 1998년 최상위 클래스였던 GT1 클래스에서 우승한 이후 17년만에 르망의 포디엄 정상을 밟았다. 2014년 르망의 최상위 클래스에 출전하면서 호언장담했던 대로 포르쉐는 복귀 2년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지난해까지 르망 24시간 5연승에 성공했었고, 최근 15년간 13차례의 우승을 차지했던 ‘최강자’ 아우디는 3위로 겨우 포디엄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아우디가 득세하기 전까지 르망 24시간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포르쉐가 우승을 차지한 것부터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아우디는 처음으로 6연승에 도전했던 지난 2009년 푸조에 패하며 첫 6연승 도전이 좌절된 데 이어, 6년만에 다시 한 번 6연승 도전에 실패하는 아픔을 맛봤다. 현재 르망 24시간 최다 연승 기록을 보유한 것이 바로 이번에 아우디의 연승 행진에 제동을 건 포르쉐라는 점이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도전자였던 푸조의 반란은 1년만에 제압할 수 있었지만, 돌아온 제왕 포르쉐를 내년에 다시 잡을 수 있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훌켄버그는 현역 F1 드라이버로는 24년만에 르망 24시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훌켄버그 이전에 현역 F1 드라이버가 르망 24시간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91년 마쯔다의 전설, 787B와 함께 우승을 차지했던 조니 허버트의 기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후 F1 드라이버들의 르망 24시간 참가가 줄어들면서 다시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도전을 훌켄버그가 성공시킨 것이다. 루키 드라이버의 르망 24시간 우승 역시 17년만에 만들어낸 대기록 중 하나다.

▲ 1991년 당시 현역 F1 드라이버 조니 허버트와 함께 우승을 거둔 마쯔다 787B

F1과 르망 24시간, 예전과는 달라진 관계

1970년대만 해도 F1과 르망 24시간의 무대 사이에는 그리 높은 장벽이 존재하지 않았다.

F1 초창기부터 드라이버들은 F2 등 하위 포뮬러 레이스는 물론 랠리, 힐클라임, 스포츠카레이스 등에 다양하게 출전하곤 했다. 포뮬러 레이스에서 세계 최고를 다투는 F1 드라이버들이 스포츠카 레이스의 최대 이벤트인 르망 24시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다수의 르망 24시간 우승자가 현역 F1 드라이버이거나 F1 드라이버의 경력이 있었다.

F1 그랑프리와 르망 24시간 레이스 사이에 높은 장벽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F1에 이른바 ‘컴플리트’ 드라이버가 많아지기 시작한 시점, 혹은 F1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시점부터다. F1이 상업적으로 훨씬 큰 성공을 거두는 동안 르망 24시간은 모터스포츠와 레이스 매니아들의 최고의 이벤트로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컴플리트 드라이버’ 즉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F1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이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80년대 중반 이후로 현역 F1 드라이버가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출전하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르망 24시간 출전을 꿈꾼 F1 드라이버들은 대부분 자신의 F1 은퇴 시점 혹은 안식년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24년 동안 현역 F1 드라이버의 F1 그랑프리 우승이 없었던 이유는, 현역 F1 드라이버가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참가할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은퇴한 F1 드라이버의 르망 24시간 출전도 줄어들었다. 1950년만 해도 F1 드라이버가 가득하던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의 전직 F1 드라이버를 만나는 게 고작이다.

▲ 2014 르망 24시간 레이스 시작을 알리는 깃발을 흔들었던 알론소

F1 드라이버들의 엑소더스가 일어날까?

훌켄버그가 르망 24시간 첫 도전에서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보이면서 다른 F1 드라이버들 다수가 르망 24시간을 포함한 WEC(세계 내구 레이스 챔피언십 )에 진출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2013시즌을 끝으로 F1에서 은퇴했던 웨버는 이미 지난해부터 많은 옛 동료들에게 내구 레이스 진출을 권한바 있다. 유혹의 주인공인 웨버가 전업 2년만에 포디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추천을 받은 드라이버들의 마음이 움직일 법도 하다.

일단 르망 24시간 진출 1순위로 꼽히고 있는 드라이버는 젠슨 버튼이다. 지난해 말 맥라렌에서 2015시즌 드라이버 라인업 발표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우울한 상황에 놓였던 버튼은 현역 드라이버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아 은퇴의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상대적으로 육체적인 부담이 덜한 내구 레이스에서는 최대 40대 중반까지는 정상급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버튼이 웨버의 부름에 응한다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르망 24시간 진출 가능성이 높은 또 한 명의 F1 스타는 페르난도 알론소다. 이미 2014 르망 24시간에서 레이스 시작을 알리는 프랑스 국기를 흔들기도 했고, 2015시즌에도 맥라렌-혼다가 허락했다면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출전할 뻔했던(성사됐다면 훌켄버그와 함께 포르쉐의 19번 차량에 타게 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알론소는 이전부터 내구 레이스에 대한 관심이 많은 드라이버였다. 아직 F1에서 더 이루고 싶은 것이 많다고 말했던 알론소지만 현재 맥라렌의 저조한 성적은 버튼과 함께 내구 레이스로의 전업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버튼과 알론소 등 F1 챔피언 출신 드라이버들이 르망 24시간에 진출한다면 다른 드라이버들이 받는 유혹도 훨씬 커질 것이 분명하다. 이전까지는 F1에서 시트를 얻지 못한 드라이버나 리저브 드라이버들이 주로 르망 24시간으로의 전업을 택했지만, 간판급 드라이버들의 진출은 무게가 다를 수 밖에 없다. F1 드라이버라고 해서 내구 레이스에서 충분한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포뮬러 레이스의 최고 레벨까지 진출한 드라이버라면 기본적인 기술과 육체적인 준비가 어느 정도 입증돼 있기 때문에 WEC 팀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 연승 행진에 제동이 걸린 르망 24시간의 강자 아우디

아우디의 선택은?

F1 드라이버들이 르망 24시간에 눈을 돌리는 것과 반대로, 르망 24시간에 출전하고 있는 팀들이 F1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일단 아우디의 경우 최근 몇 년 동안 계속해서 F1 진출설을 부인해왔고, 몇 달 전에도 F1에 관심이 없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하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절대 강자로 군림해온 르망 24시간에서의 입지가 흔들린다면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적지 않다.

당장 한 번 포르쉐에게 패했다고 아우디가 섣부르게 르망 24시간에서 발을 뺄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같은 폭스바겐의 지붕 아래 있는 포르쉐와 출혈 경쟁을 하는 것도 부담이고, 만약 포르쉐에게 2, 3년 연속으로 패한다면 부담감의 무게가 달라질 것이다. 자신들이 주로 만드는 승용차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F1 대신 LMP1에 집중한다는 얘기도 적절한 변명이 되지 않는다. 현재의 LMP1은 클래스 이름에 명시된 대로 르망 전용의 프로토타입 차량이고, 승용차와의 괴리는 F1 못지 않기 때문이다. F1에서 아우디 입맛에 맞는 규정 변경을 조금 해 주고 명분만 마련해준다면 아우디의 태도는 급변할지 모른다.

토요타의 입장도 애매하다. 포르쉐가 복귀 2년만에 르망 24시간의 정상에 섰지만, 4년째도전에 나선 토요타는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르망 정복에 실패했다. 지난해 WEC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르망 24시간에서는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F1에서 철수한 혼다가 엔진 공급자로 F1에 복귀한 것을 보며 토요타가 어떤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이브리드 기술이라면 자신들이 최강이라고 생각했는데, 메르세데스-벤츠의 하이브리드가 F1을 호령하면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하기엔 아깝다.

물론 현재 아우디나 토요타가 F1에 당장 뛰어들기에는 부담도 크고 명분도 없다. F1이란무대가 1~2년 준비한다고 쉽게 성공할 수 있는 무대도 아니다. (혼다가 2년을 준비한 엔진, 파워 유닛에서 부족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 그렇다면 보다 장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르망 24시간에 계속 출전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대를 찾아볼 것인가? F1 못지 않은 투자가 필요한 르망 24시간에서 몇 년 동안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고 앞으로의 가망도 그리 밝지 않다면? 다른 결정을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2015 르망 24시간 레이스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많은 기록을 만들어낸 것은 물론, F1 드라이버들과 르망 24시간에 참가 중인 대형 자동차 제조사들에게도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레이스 그 자체로 원래 큰 의미를 갖는 르망 24시간이지만, 모터스포츠 전체로 봤을 때도 과거의 의례적인 순위표를 파괴한 올해 경기의 기록은 훨씬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 옆 동네라고 할 수 있는 F1 역시 르망 24시간의 여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올 시즌 르망 24시간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처럼, 앞으로 F1과 르망 24시간을 포함한 모터스포츠 무대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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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jesus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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