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영국의 레이싱 드라이버 수지 울프에 대한 특집 기사를 다뤘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F1 데뷔를 꿈꾸는 테스트/개발 드라이버가 평소 어떤 훈련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준비를 계속하는가에 대한 그리 무겁지 않은 소개 기사였다.

 

하지만 이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지난 1, 2년 동안 수지 울프가 등장했던 기사나 소식들에는 어김 없이 가혹한 댓글이 달렸다. 서구 권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F1을 아는 사람들 중 일부는 수지 울프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비판이라기보다 비난에 가까운 공격을 한다. 이런 공격은 그녀가 페이 드라이버라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 말이 맞는 말이든 틀린 말이든......

▲ 지난 1년 동안 페이 드라이버 논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수지 울프

 

수지 울프에 대한 공격들

수지 울프에 대한 공격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여성으로서 남자들의 무대에 나서지 말라는 얘기고, 또 다른 하나는 남편 덕에 자리를 꿰찼을 뿐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페이 드라이버라는 것이다.

 

우선 첫번째 비난은 길게 얘기할 문제가 아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성 차별적인 공격은 근거도 없을뿐더러 그 발언을 입에 담는 사람의 사고 방식을 오히려 걱정해야 될 문제다.

 

비록 F1쯤 되면 육체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가해지기 때문에 여성에게 불리한 면이 없다고는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선입관을 설명할 정도의 근거는 없다. 혹시 수지 울프의 육체적 능력을 걱정하는 사람이 공개된 그녀의 SNS 계정을 본다면 이런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페이 드라이버 논란은 얘기가 좀 복잡하다. 지금은 메르세데스로 자리를 옮겨 챔피언 등극에 큰 공헌을 한 남편이 없었다면 수지 울프에게 개발 드라이버로서의 지위가 주어졌을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몇 차례 테스트 주행에 나서 F1 레이스카로 랩 타임을 기록했을 때, 타임시트에 남겨진 랩 타임도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과연 그녀가 F1 개발 드라이버로서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일단 피할 수 없다.

 

의구심을 가질만하고 이런저런 질문은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저 페이 드라이버라는 사실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당할까? 페이 드라이버는 부당하다거나 그들의 존재가 모터스포츠에 해악을 끼친다는 생각은 잘못인 걸까?

 

▲ 쟁쟁했던 2002년의 드라이버 라인업 속 두 명의 동양인

 

페이 드라이버의 시대

시계를 13년 전으로 돌려보자. 당시 F1의 라인업은 한 마디로 쟁쟁했다. 페라리에서만 2년 연속, 통산 네 번째 챔피언에 오른 슈마허가 다섯 번째 타이틀 획득에 도전하고 있었고, 맥라렌은 하키넨이 은퇴한 빈 자리에 떠오르는 스타 라이코넨을 채워 넣었다. 자우버에서는 펠리페 마싸, 미나르디에서는 마크 웨버가 F1에 데뷔했다.

 

그런데 2002시즌 F1 개막전의 중하위권 팀 드라이버 라인업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조던은 많은 의욕을 보이지 않았던 장 알레시 대신 타쿠마 사토를 시트에 앉혔다. 미나르디는 딱 한 시즌을 뛴 페르난도 알론소와 세 그랑프리에 참가했던 알렉스 융 중 후자를 택했다. 두 드라이버가 함께 참가했던 세 그랑프리의 퀄리파잉에서 알론소는 융보다 1초 이상 빨랐고, 마지막 일본 그랑프리에서 두 드라이버의 격차는 2초 가까이 벌어졌었다. 그래도 미나르디의 선택은 알렉스 융이었다.

 

2002시즌에도 알렉스 융은 팀메이트 웨버와 비교해 매우 나쁜 성적을 거뒀다. 1년의 휴식을 거쳐 알론소가 르노를 통해 F1에 복귀하고 폴 포지션과 우승을 차지하며 새 시대의 스타로 떠오른 것을 생각하면 2002시즌 융을 선택한 미나르디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107% 룰의 주인공으로 종종 언급되던 알렉스 융은 대표적인 페이 드라이버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타쿠마 사토가 영국 F3 챔피언 출신에, 마카오 그랑프리 우승 등의 배경으로 페이 드라이버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반면, 알렉스 융은 항상 비난의 표적이 됐다. 개중에는 수긍할만한 비판도 있었지만, 선을 넘은 과도한 비난도 있었다. 수지 울프에게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비난을 던지는 것처럼 알렉스 융에게 인종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페이 드라이버에 대한 과도한 적개심이 문제였다.

 

문제는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과 동시에 실제 시트를 차지하는 페이 드라이버의 수는 더 늘었고, 전반적으로 다수의 드라이버가 페이 드라이버의 성격을 갖는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좋든 싫든 페이 드라이버는 F1과 다수의 모터스포츠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돼버렸다.

 

▲ 라우다도 슈마허도 일종의 페이 드라이버였다

 

페이 드라이버는 모터스포츠의 원죄일까?

페이 드라이버에 대한 비난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를 논하기 전에 먼저 페이 드라이버에 대한 정의 문제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다.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훗날 챔피언이 된 니키 라우다나 미하엘 슈마허, 페르난도 알론소 등도 처음에는 페이 드라이버였다. 이들은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는 알렉스 융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소위 ‘순수한 페이 드라이버’와 어느 정도 페이 드라이버의 성격이 있는 드라이버는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일단 사전적 정의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보니 나름 페이 드라이버의 선을 긋는 노력이 필요하다. 드라이버의 재능을 알아보거나 상품 가치를 알아본 후원자가 뒤를 봐준 경우라면 순수한 페이 드라이버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슈마허는 F1 데뷔 전부터 메르세데스-벤츠라는 강력한 백그라운드가 있었다. 알론소는 2010년 페라리 이적 과정에서 산탄데르 은행의 거대 자본을 끌어왔지만, 그가 최고의 드라이버라 돈이 따라온 것이지 돈이 있기 때문에 드라이버 시트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순수한 페이 드라이버라면 모터스포츠에 아무 관심도 없는 드라이버 주변의 대기업이나 관계자가 별다른 생각 없이 돈만 쥐어주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최근에는 비용이 꽤 부담스러운 수준이긴 하지만, 본인이 지참금을 가져오는 경우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정말 생각하는 것이 돈을 쓰는 것뿐이고, F1 레이스를 심심풀이로 생각하는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의 비난은 정당하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당장 알렉스 융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런 순수한 페이 드라이버와는 다른 면이 있었다. 돈을 지참했을지언정 F1에 대한 열정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말레이지아에서 그의 F1 진출과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거듭한 것까지 심심풀이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를 비판할만한 정당한 이유는 성적밖에 남지 않는다. 실제로 알렉스 융은 하위 포뮬러에서도 F1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F1을 떠난 이후 A1 그랑프리에서는 놀라운 활약을 펼치기는 했지만......

 

어쨌든 알렉스 융의 케이스는 소위 말하는 ‘순수한 페이 드라이버’의 범위를 매우 좁힐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팀을 운영하고 레이스에 참가하는데 엄청난 자본이 필요한 모터스포츠는 근본적으로 돈이 필요하고, 페이 드라이버는 그 돈을 제공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페이 드라이버 성격’은 배제하기 힘들다. 조금 과장해서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한 F1이라면 더욱 그렇다. 누군가 엄청난 거금을 선뜻 선물하지 않는 한 열정을 불태우며 지참금까지 가져온 알렉스 융을 비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 자우버의 이른바 ‘페이 드라이버 라인업’

 

페이 드라이버, 비난만이 답일까?

하지만 페이 드라이버를 싫어하는 많은 이들은 “재능 있는 드라이버가 빛을 보지 못한다.”라거나 “모터스포츠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이유를 든다.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주장 속에도 고민할만한 문제는 남아있다. 도대체 그 재능이란 것은 무엇을 가지고 따질 것이며, 모터스포츠의 순수성이란 무엇이며 존재하기는 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F1 드라이버가 되려면 매우 빠른 포뮬러 레이스카를 잘 조종할 수 있는 능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자질들이 요구된다. 문제는 이런 능력이 하위 포뮬러에서의 성적으로 줄 세우듯 따질 수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잘하고 못하는 능력이란 것도 한 가지만 가지고 측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일부 능력은 객관적 측정이 아예 불가능하기도 하다. 결국 F1에서 달려봐야 안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테스트 드라이브와 실전이 다르므로 시트를 내주고 F1 그랑프리에 참가시켜봐야 그 능력이란 것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1, 2년으론 부족할 때가 있다.

 

과거의 챔피언 중 데뷔 후 3~4년 동안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경우도 많다. 더블 챔피언으로 현존 최고의 드라이버로 평가 받는 알론소 역시 데뷔 시즌 (세 경기에서 팀메이트를 압도했다고는 하나) 단 1포인트도 기록하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것이 실은 그다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드라이버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다.

 

성적을 가지고 당장 비판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페이 드라이버의 순수하지 못한, 돈을 가지고 시트를 사는 ‘깨끗해 보이지 않는’ 행태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모터스포츠가 순수한 경쟁인 적이 있기는 했던가? 염가의 승용차도 구매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레이스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야구든 피겨 스케이팅이든 돈이 없다면 일정 수준 이상 자신의 실력을 검증해볼 기회 자체를 얻을 수 없다. 모터스포츠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떤 스포츠든 자본이 뒷받침된 쪽이 훨씬 유리한 것은 당연하고, 값비싼 자동차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런 경향이 더 강해지는 것뿐이다.

 

이쯤 되면 페이 드라이버를 비난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문제를 왜 비난하는 것인지 혼동된다. 실제로는 특정 드라이버를 페이 드라이버로 비난하다가도 어느 틈엔가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손바닥 뒤집듯 하는 모습도 나온다. 올 시즌 개막전부터 법정 싸움에까지 휘말리며 자우버의 시트를 차지한 에릭슨과 나스르는 많은 이들이 페이 드라이버로 평가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성적이 어느 정도 나오면 그런 비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든다.

 

지금까지의 페이 드라이버에 대한 이야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어떤

드라이버가 어떤 방식으로 시트를 얻게 됐는지는 그다지 중요하다는 얘기다. 거의 대부분의 드라이버가 어느 정도 페이 드라이버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인맥이 없다면, 운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공평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조건이 서로 다 다르다면 문제는 돈을 얼만큼 지참했느냐가 아니라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F1 드라이버로서 ‘일정 시간 이상 경쟁하면서’ 어떤 성적을 내는가 하는 부분이다.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상업적인 가치를 증명해 시트를 오래 차지할 수 있다면 더 좋다. 어차피 상업 스포츠인 이상 그런 부분은 감수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든 오랫동안 무대에 나서고, 그 결과로 인정받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이쯤 되면 원래 그 드라이버가 페이 드라이버냐 아니냐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너무나 역량이 떨어지는 드라이버를 비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페이 드라이버라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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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jesus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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