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펼쳐진 2015 캐나다 그랑프리는 최근 F1의 뜨거운 감자인 파워 유닛 문제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앞선 스페인과 모나코 그랑프리가 상대적으로 엔진/파워 유닛의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잠시 잠복해있던 이슈가 파워 서킷인 질 빌너브 서킷에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메르세데스는 웃었고, 페라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지만, 르노와 혼다의 관계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2013시즌까지 4년 연속 챔피언 타이틀을 독차지했던 레드불은 르노와 연일 설전을 벌이며 사실상 분쟁 상태에 들어갔다. 맥라렌은 올 시즌 손을 잡은 혼다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드라이버들의 인내는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갈등은 F1에서 생각보다 자주 벌어졌고, F1 팀과 엔진 제조사의 관계가 파경으로 치닫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갈등의 결과에 따라 F1의 역사는 크게 바뀌곤 했다.

▲ 1994년 푸조 엔진과 함께 성적이 급락한 맥라렌

 

혼다와 결별한 뒤의 맥라렌

2013시즌 중 맥라렌과 혼다가 손을 잡을 것이란 루머가 나오던 시기부터 사람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F1을 호령했던 맥라렌-혼다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F1 사상 최강의 레이스카들과 그 심장의 혼다 엔진은 무적에 가까운 절대 강자였고 알랑 프로스트, 아일톤 세나 등 전설적 드라이버들과 함께 많은 기록을 만들어냈다.

 

TAG 시대였던 1984년부터 혼다와 함께하기 시작한 1988년을 거쳐 1992년까지, 맥라렌은 매년 5승 이상을 거두며 모두 여섯 차례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나머지 세 시즌에도 포인트 순위는 2위였다. 혼다와 결별하고 잠시 포드 코스워스 엔진을 사용한 1993시즌에도 맥라렌은 5승과 시즌 종합 2위의 성적을 지켜냈다.

그러나 1994년 모든 것이 바뀌었다.

1994시즌 푸조 엔진을 선택한 맥라렌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우승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시즌 종합 순위는 4위로 내려앉았다. 16차례의 그랑프리 중 여덟 번의 포디엄 피니시를 기록했지만 무려 19회의 리타이어를 기록했다. 결국 푸조와 맥라렌의 인연은 단 1년만에 끝나버렸고 맥라렌은 한동안 ‘4위 팀’으로 전락해 챔피언 타이틀 경쟁에 나서지 못했다.

 

이후 다른 팀들에 엔진을 공급한 푸조가 여러 차례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맥라렌은 메르세데스와 손을 잡은 뒤 3년 동안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으니 단순히 엔진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강의 엔진을 포기하고 경험이 없는 새로운 엔진과 인연을 맺을 때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무엇인지 맥라렌-푸조의 시대는 분명하게 보여줬다.

▲ 과감한 선택이 실패로 이어진 1976년의 브라밤-알파로메오

 

성공을 담보한다면 과감한 시도가 아니다

 

맥라렌과 푸조의 잘못된 만남은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2015시즌부터 혼다 파워 유닛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맥라렌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기존에도 최강의 엔진을 만들던 메르세데스와의 20년 인연을 끊으면서까지 맥라렌은 과감한 시도를 했고, 도박적인 선택은 지금 그 댓가를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성공을 담보해주지 않는데도 과감한 시도를 한 맥라렌의 선택은 비난 받아야 할까?

 

비슷한 사례를 1976년의 브라밤에서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F1 최강 팀 중 하나였던 브라밤은 1976시즌을 맞아 알파 로메오의 수평대향 12기통 엔진을 도입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기존 브라밤의 엔진은 당시 7~8년 동안 F1을 평정하고 있던 포드-코스워스의 DFV 엔진이었다. 그리고 브라밤의 과감한 시도는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알파 로메오 엔진은 강력했지만 너무 무거웠고 고장과 각종 문제도 많았다. 결국 인내심을 발휘해 알파 로메오에게 기회를 줬던 브라밤은 3년 뒤 포드-코스워스 DFV 엔진을 다시 장착했다.

 

브라밤이 실패를 각오하고 무리한 시도를 한 것은 기존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엔진만으로는 ‘상대적인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사용하는 엔진으로는 같은 경쟁력을 갖는 게 고작이고, 만약 작고 야무진 DFV 엔진이 우리의 차와 맞지 않는다면? 보다 크고 강력한 엔진으로 변수를 만드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다. 성공한다면 확실한 승리의 카드가 될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손해는 아니다. 늘 2등만 하는 것 보다, 1등을 노리다가 꼴찌를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브라밤은 그렇게 과감한 시도를 했고, 실패했다.

 

혼다와 손을 잡기 전 맥라렌의 상황도 비슷했다. 오랫동안 밀월 관계를 유지하던 메르세데스는 팩토리 팀을 만들었고, 아무리 같은 엔진, 같은 파워 유닛을 손에 넣는다 해도 팩토리팀을 뛰어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메르세데스의 B팀처럼 움직이는 포스인디아와 비교해 특별히 강력한 경쟁력을 보이지 못한 것도 맥라렌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대로 적당히 3, 4등 팀에 머무르느니 독자적인 엔진 공급자와 손잡고 변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 엔진 제조사와의 분쟁으로 한 순간 중위권 팀으로 추락한 윌리암스

 

윌리암스 몰락의 시작은 엔진 제조사와의 분쟁부터?

 

하지만 지금까지 맥라렌과 혼다의 재결합은 성공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그렇다. 프리시즌 테스트에서는 시즌 중반이나 되어야 경쟁력을 갖출 것이란 얘기가 나왔고, 이제는 올 시즌 내에 포디엄에 오르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혼 10년차에 멱살을 잡고 싸우는 레드불-르노의 관계와 달리, 맥라렌-혼다의 모습은 너무나 조심스럽다. 혼다의 파워 유닛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기 힘들 정도로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맥라렌이 과도하게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는 엔진 제조사와의 분쟁이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F1에서 가장 강력한 엔진을 보유한 팀은 윌리암스였다. 찬란했던 윌리암스-르노의 시대가 일단락된 후 다시 한 번 정상에 서기 위한 노력을 펼친 윌리암스가 선택한 파트너는 BMW였고, BMW는 윌리암스의 기대대로 가장 강력한 엔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엔진이 강하다고 승리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었고, 윌리암스-BMW는 상위권에서 경쟁하면서도 끝내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지 못했다. F1의 명문 윌리암스와 강력한 엔진을 만든 BMW는 서로 상대방을 탓했고 갈등은 깊어졌다. 결국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2005시즌을 끝으로 윌리암스와 BMW 역시 파경을 맞았다.

 

2006시즌은 윌리암스 몰락의 시작이었다. 우승이나 포디엄 피니시는 고사하고, 포인트 획득 횟수가 단 5회에 불과했다. 2007시즌 이후로도 상황은 나아질 줄 몰랐고 윌리암스는 중위권을 거쳐 하위권 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코스워스 엔진을 토요타로 바꾸고, 다시 코스워스를 거쳐 르노 엔진을 사용해도 (2012년의 예외를 제외하면) 차이가 없었다. 2014시즌 메르세데스 파워 유닛과 함께 다시 상위권으로 돌아올 때까지 윌리암스는 너무 오랜 암흑기를 거쳤다.

 

자칫하면 현재의 레드불도 르노와 결별한 뒤 10년 전 윌리암스의 전례를 답습할지도 모른다. 맥라렌이 우려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엔진(파워 유닛 )을 선택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1, 2년에 결론을 낼 얘기가 아니고, 팀의 10년을 좌우할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맥라렌은 혼다와 장기간의 계획을 가지고 파트너 십을 발전시켜야 하며, 한 시즌 엉망이 됐다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맥라렌은 윌리암스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고, 최근에도 (르노와 갈등이 깊어지는) 레드불처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다.

▲ 혼다 파워 유닛과 함께 최악의 성적을 기록 중인 2015년의 맥라렌

 

맥라렌-혼다의 힘은 언제 볼 수 있을까?

 

일단 2015시즌이 1/3 이상 경과하면서 당분간 맥라렌-혼다가 F1을 호령하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됐다. 처음 맥라렌-혼다의 결합이 발표됐을 때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현재까지의 모습만으로 본다면 확실히 쪽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맥라렌의 수뇌부에서는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들은 이런 암흑기가 불가피하고, 짧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재 맥라렌은 페라리와 더불어 두 명의 챔피언을 보유한 팀이다. 특히 라이코넨을 제외하면 최고령에 해당하고 그랑프리 참가 횟수로는 단연 현역 1, 2위를 기록 중인 버튼과 알론소가 함께하고 있다. 단지 더블 월드 챔피언일 뿐 아니라 기계적인 피드백과 ‘개발 드라이버’로서의 역할도 많은 부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시즌 초 맥라렌은 혼다와 다시 손을 잡은 올 시즌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고, 두 챔피언의 경험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좋지 않은 쪽으로 딱 들어맞았다.

 

결국 남은 것은 이 암흑가기 언제 끝날 것인지를 예상하는 것이다. 일단 2015시즌은 어렵다. 맥라렌과 혼다는 올해 사용할 수 있는 9개의 토큰 중 신뢰도 업데이트를 위해 2개 토큰을 사용하긴 했지만 성능 강화를 위한 업데이트는 미루고 있다. 각 업데이트가 장기적인 계획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다는 점에서 섣부르게 성능을 끌어올리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엔진과 파워 유닛을 만드는데 주안점을 뒀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2015시즌에는 여러 가지 신뢰도 문제를 해결하면 만족할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2015년의 버튼과 알론소는 실험실 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게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2016시즌도 쉽지는 않겠지만 2017시즌이 되면 맥라렌-혼다의 진가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르노는 당장 내년에도 시즌 중 개발을 허용하라고 떼를 쓰지만, 더 문제가 많아 보이는 혼다가 조용한 것은 뭔가 장기적인 계획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물론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이고 모든 게 페이크일 수도 있지만) 단기적인 업데이트의 최소 사이클을 18개월 정도로 본다면, 지금 뭔가 감을 잡은 혼다 파워 유닛이 제 기량을 보여주는 것은 2016년 후반이 될 것이다. 그때 시즌 중 업데이트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2017시즌에야 맥라렌-혼다가 상위권에 복귀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F1 팀과 엔진 제조사의 관계는 마치 부부 관계를 연상시킨다. 잘 될 때는 너무나 죽이 잘 맞고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한 순간 모든 것이 틀어지고 파경을 맞기도 한다. 현재 분위기가 좋지 않은 르노와 혼다의 경우 각각 레드불, 맥라렌과 위험한 동거를 계속하고 있다. 르노와 레드불이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면, 맥라렌과 혼다는 조심스럽게 관계를 오래 끌고 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과연 이 두 파트너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또 그 선택 중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긴 시간만이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맥라렌과 혼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적어도 18개월은 모든 비난을 다 감수하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인내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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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jesus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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