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뒤면 개막될 F1 2015시즌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는 멕시코 그랑프리가 개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F1 팬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멕시코도 F1 그랑프리를 개최하는데, 우리나라는……’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뭘 해도 최고여야 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나 반대로 이런 이런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안 된다는 막연한 자조 두 가지 모두 듣기에 불편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남의 나라를 은근 무시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 불편했다. 특히 자동차와 모터스포츠, F1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 1965 멕시코 그랑프리의 레이스 스타트

멕시코 그랑프리의 부활

멕시코는 몇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우리나라와 멕시코는 GDP도 비슷한 수준이고(201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보다 멕시코의 GDP가 조금 더 크다. ) G20에 속해 있으면서 경제적 영향력에서 최상위권은 아니다. 평균적인 경제 규모가 큰 것에 비해 특정 대기업에 부가 편중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자동차 생산량을 기준으로 따지면 우리나라가 세계 5위권, 멕시코는 세계 8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모터스포츠와 자동차 문화를 기준으로 따지면 멕시코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는 나라다. F1을 기준으로만 따져도 이미 1962년 첫 번째 멕시코 그랑프리가 개최됐고 1963년부터 F1 챔피언십 그랑프리에 편입되어 이미 열 다섯 차례의 그랑프리를 개최했다. 1961년 세계 모터스포츠 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리카르도 로드리게즈의 데뷔 이래 모두 여섯 명의 F1 드라이버를 배출했다. F1을 제외한 모터스포츠 분야에서도 멕시코는 상당한 규모의 시장과 두터운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한 마디로 모터스포츠의 선진국 중 하나다.

멕시코 그랑프리는 역사적으로 F1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이벤트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65년에는 F1 진출 2년차의 혼다가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F1 드라이버들에게 멕시코 그랑프리가 펼쳐지는 헤르마노스 로드리게즈 서킷은 가장 인기 있는 서킷 중 하나였고, 사고 위험이 높은 코너 페랄타다의 인기도 높았다. F1 그랑프리가 중단된 시기 여섯 차례의 챔프 카 그랑프리가 같은 서킷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모터스포츠와 F1에서 멕시코를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이야기인지 대략 감이 잡힌다.

▲ 2015 멕시코 그랑프리 홍보 영상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포로 솔

야구장을 가로지르는 서킷

멕시코 그랑프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올 시즌 다시 F1 팬들에게 선보일 헤르마노스 로드리게즈 서킷이다. 지난해 멕시코 그랑프리의 부활이 확정 발표된 직후 공개된 2015 멕시코 그랑프리의 홍보 영상은 F1 올드 팬들에게는 낯익은, 하지만 최근 F1을 접한 팬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서킷 레이아웃과 특징을 가진 헤르마노스 로드리게즈 서킷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2000년대 챔프카 그랑프리를 유치하고 NASCAR 레이스가 열리기도 했던 헤르마노스 로드리게즈 서킷은 야구장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독특한 레이아웃으로 유명하다. (문제의 홍보 영상에서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악명 높은 페랄타다에 진입하기 전 통과하는 ‘포로 솔’은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놀랍게도) 현재 멕시코시티 레드 데블스가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수용 관중 5만명 규모의 대형 프로야구 구장이다. 서킷은 야구장의 우중간 쪽에서 진입해 좌중간을 거쳐 내야로 진입한 뒤 3루 쪽 내야 관중석 사이를 빠져가는 레이아웃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의 야구 인기 역시 우리나라 못지 않다는 점에서 서킷의 활용 방법은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포로 솔은 야구장이자 레이스 서킷의 일부로 쓰일 뿐 아니라 최대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서트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멕시코 사이에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있지만, 같은 공간을 서킷과 야구장, 콘서트 장소 등으로 활용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키고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아이디어는 배울 점이 많다. (물론 지금 당장 우리나라의 야구장을 가로지르는 서킷을 만드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불가능하겠지만. ) 선진적인 자동차 문화라는 것이 그저 대중의 인식을 확 바꾸거나 많은 돈을 쓰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 젊은 나이에 놀라운 기록들을 세웠던 리카르도 로드리게즈

F1을 빛낸 이름 리카르도 로드리게즈

많은 사람들이 F1이나 모터스포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큰 오해 중 하나는 자동차 문화나 모터스포츠가 발전하려면 경제적으로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멕시코의 경제 규모는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고,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하다. 과거에도 잠시 경제 상황이 좋았던 시절은 있었지만 냉정하게 얘기해서 선진국의 대열에 들었다고 얘기할만한 시기는 없었다. 전반적인 국민의 생활 수준이나 경제적인 여건이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멕시코는 이미 여섯 명의 F1 드라이버를 배출할 수 있었다.

F1과 관련해서 멕시코를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리카르도 로드리게즈다. 10대 초반 모터싸이클 라이더로 많은 우승을 차지하면서 명성을 얻은 로드리게즈는 14세의 나이로 르망 24시간 출전을 시도했지만 출전이 허가되지 않았고, 1960년 18세의 나이로 르망 24시간 출전이 허가되자 2위로 레이스를 마치는 사건을 일으켰다. 페라리 스포츠카로 르망 24시간 최연소 포디엄 피니시의 기록을 세운 로드리게즈는 바로 F1 레이스카의 게스트 드라이버로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레이스카에 오를 기회를 얻으면서 최초의 멕시코 출신 F1 드라이버가 되었다.

로드리게즈는 19세의 나이로 1961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F1에 데뷔해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고, 퀄리파잉에서 같은 페라리의 (같은 해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는) 필 힐 등 쟁쟁한 드라이버를 제치고 2위를 기록하며 최연소 프로트 로 스타트의 기록을 세웠다.

이듬해 페라리의 정식 드라이버가 된 로드리게즈는 타르가 플로리오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넌 챔피언십 그랑프리인 포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놀라운 활약으로 모두에게 미래의 챔피언 감으로 여겨졌으나, 페라리가 불참한 넌 챔피언십 이벤트인 멕시코 그랑프리의 연습 주행 도중 사고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리카르도 로드리게즈는 아직까지도 많은 최연소 기록을 가지고 있고,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드라이빙은 F1과 모터스포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리카르도가 목숨을 잃은 뒤 F1에 데뷔한 그의 형 페드로 로드리게즈는 쿠퍼와 BRM 소속으로 동생이 오르지 못한 포디엄 정상에 두 차례나 올랐지만, 그 역시 1971년 독일 노리스링에서의 스포츠카 레이스 도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운 결말을 맞기는 했지만 누구보다 뛰어났던 로드리게즈 형제의 활약은 멕시코 모터스포츠와 자동차 문화가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이후 멕시코시티의 서킷은 형제의 이름을 따 헤르마노스 로드리게즈 서킷으로 불리게 되었다. (헤르마노스는 형제라는 뜻이다. )

 

▲ 열정적인 멕시코의 F1 팬들

F1과 모터스포츠, 자동차에 대한 열정

결국 이런저런 루머가 오가는 가운데 모두가 부활을 원했던 멕시코 그랑프리가 다시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은, 로드리게즈 형제가 불을 지핀 이래 수 십 년 동안 멕시코의 모터스포츠 열기가 식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경제 여건과 관계 없이, 현역 F1 드라이버의 유무와 관계 없이 멕시코 사람들은 특유의 열정적인 성격을 F1 팬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F1 드라이버들과 관계자들이 멕시코 그랑프리에 기대를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배경만 봤을 때 멕시코는 인접한 미국이나 모터스포츠 시장이 포화된 유럽보다 F1에게 훨씬 매력적인 무대인 것이 분명하다. 2014시즌 페레즈와 구티에레즈라는 두 명의 현역 F1 드라이버가 텍사스 오스틴에서 레이스를 펼칠 때 이들의 성적과 관계 없이 수많은 멕시코 팬들이 보여준 응원은 다른 모든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할 만 했다. 세계 최대의 부호 중 한 명인 카를로스 슬림이 이끄는 텔멕스의 스폰서 십도 F1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이쯤 되면 1990년대 초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F1이 (사고와 안전 문제가 급격히 이슈화된 1994년이 되기 전에) 멕시코 그랑프리를 포기한 것이 현재의 F1 팬들에겐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멕시코 그랑프리가 중단된 이유는 (다소 엉뚱하게도) 대기 오염 문제였다. 1990년대 초 멕시코 시티의 대기 오염이 심각한 수준에 달하면서, 현재와 달리 환경 문제에 취약했던 F1 그랑프리가 철퇴를 맞은 것이다. 이 문제를 연결 지어 생각하면 최근 10여 년 간 환경 문제에 관련된 사항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왔고,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인 2014시즌의 파워 유닛 규정 변화 이후 멕시코 그랑프리가 부활한 것은 우연치고는 상당히 재미있는 우연이다.

지금까지 정리한 이야기를 한 번 훑어봤다면, 여러 가지 지표와 환경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나을 것이 별로 없어 보였던 멕시코에 대한 관점이 바뀔 수도 있다. 자동차를 많이 만드는 것 외에는 우리나라가 꼭 멕시코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없다. ‘멕시코도 하는데’라고 무시하는 뉘앙스로 얘기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멕시코의 모터스포츠 유산에 대해서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나을지 모른다. 멕시코는 F1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은 물론, 세계 모터스포츠, 자동차 시장에서도 중요한 존재로 점차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솔직히 부럽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다른 나라를 무시하거나 무한히 위대하다고 칭송하지 않는 태도일 것 같다. ‘멕시코도 하는데 우리는’ 이라고 넋두리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누구에게서라도 배울 것은 배우고 바꿀 것은 바꿔 적용해서, 우리만의 자동차 문화를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 당장 암울해 보이는 우리나라의 모터스포츠도 몇 년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크게 발전해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어떤 일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멕시코와 우리나라는 많이 닮아 있다. 그렇다면 또 안될 것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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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jesus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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