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레드불의 리카도가 우승을 차지하기 몇 시간 전, 2014 시즌 WRC 제 9라운드로 펼쳐진 ADAC 랠리 도이칠란트, 즉 독일 랠리에서 현대 셸 월드 랠리 팀의 티에리 누빌 이 우승을 차지했다. WRC에서 현대의 우승은 메이저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한국 국적 팀이 거둔 첫 번째 우승이었고, 메이저 모터스포츠 이벤트의 포디엄에 애국가가 울린 것도 사상 처음이었다. 여러모로 2014년 8월 24일은 역사에 길이 남을 뜻 깊은 날이었다고 부를 만 하다.

그런데, 리카도의 F1 벨기에 그랑프리 우승과 누빌의 WRC 독일 랠리 우승에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2014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우승 후보였던 해밀튼이 리타이어하고, 해밀튼과의 접촉으로 프론트 윙에 손상을 입은 로스버그가 정상적인 레이스를 펼치지 못했다. WRC 독일 랠리에서는 여유롭게 선두를 질주하던 라트발라가 사고로 경쟁에서 이탈했고, 이어서 선두를 물려받은 미에케마저 사고로 리타이어했다. 한마디로 우승 후보의 완주 실패가 리카도와 누빌의 우승에 큰 도움을 준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난 뒤 레이스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리카도와 누빌의 ‘우승의 가치’가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우승의 가치’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일까?

 

▲ 2014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 다니엘 리카도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이들의 ‘우승의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완주의 가치’가 ‘빠르지만 완주하지 못한’ 경우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300km의 레이스에서 두 시간 동안 299km를 달릴 때까지 압도적으로 선두를 유지했다 하더라도, 나머지 1km를 달리지 못하고 멈춰선 다면 절대 우승할 수 없다. 완주하지 못한 자에게 우승 트로피가 주어지는 레이스는 없다. 빠르지 않더라도 완주가 우선이란 뜻이다.

혹자에게는 ‘빠르지 않더라도 완주가 우선’이란 얘기나 ‘압도적인 선두였더라도 완주에 실패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스포츠의 경우를 빗대어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100m 달리기를 하는데 마지막 1m를 남기고 넘어졌다면? 축구 경기에서 모든 선수가 마지막 5분을 남기고 지쳐 쓰러져 경기를 포기했다면? 마라톤에서 결승선을 100m 남기고 더 이상 달릴 수 없다면? 이모든 경우 ‘이전에 얼마나 압도적인 경기를 했느냐 와 상관 없이’ 승리는 기대할 수 없다.
레이스도 마찬가지다.

F1은 400m를 달리는 드래그 레이스와 다르다. 대부분의 그랑프리에서 300km 이상을 달리며 승부를 가린다. 단지 한 랩을 누가 빨리 달릴 수 있는가가 전부라면 레이스도 딱 한 바퀴면 족할 것이다. 하지만 레이스는 그저 어떤 차가 빠른 랩 타임을 기록하는지 측정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레이스는 대부분 ‘오랜 기간, 먼 거리를 달린 뒤’ 누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는지에 따라 승자를 결정하는 스포츠다. ‘오랜 기간, 먼 거리를 달리는 것’이 기본 전제라는 뜻이다. 모터스포츠의 종류에 따라 기간과 거리의 기준이나 운영 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틀은 마찬가지다.

 

▲ 완주 가능한 레이스카의 중요성을 강조한 마이크 개스코인

긴 시간, 먼 거리를 달려 우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은 짧은 거리를 달리는 승부가 확대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 모터스포츠가 태동하던 시기에는 초장거리 레이스가 먼저 탄생했고, 처음부터 ‘누가 어마어마하게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가’를 겨루면서 그 중에 가장 빠른 차량을 찾는 것이 본질이었다. 이후 점차 이동 거리가 짧아지고, 그랑프리는 서킷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가둬진 것뿐이다. 한 랩의 랩 타임을 재고 누가 가장 빠른지 측정해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은 이런 레이스의 틀이 갖춰지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탄생했다.

따라서 레이스에서 승리할 수 있는 레이스카의 제작은 ‘완주할 수 있는 차량’의 제작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당연히 매우 느리게 달려서 완주할 수 있는 차량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느 선 이상으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모든 부분에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고, 메이저 모터스포츠 이벤트로 꼽히는 무대라면 그 부담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저 모터스포츠 이벤트에서 완주하는 차량을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렵다. 단지 이론상의 튼튼함이나 시뮬레이션 상의 견고함뿐 아니라, 레이스 중 부딪힐 수 있는 여러 가지 변수와 갑작스런 사건 사고에 대응해 완주 가능한 차량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가장 뛰어난 F1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크 개스코인은 “빠르게 달리는 차를 만드는 것은 쉽다. 그러나 완주 가능한 차량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는 말을 남겼다. 일단 완주 가능한 차량을 만들 수 있어야, 그 바탕에서 점차 속도를 높여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14시즌이 시작되기 전 프리-시즌 테스트에서 레드불의 문제로 가장 크게 지적된 것이 레이스카의 신뢰도였고,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주가 쉽지 않고, 우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바 있었다. 올 시즌 WRC에 복귀한 현대 역시 개막전인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두 드라이버가 모두 리타이어했다. 차량의 신뢰도 확보와 함께 사고를 피해 완주시키는 역량이 담보되지 않았을 때 완주는 요원해지고 우승은 꿈꿀 수 없게 된다.

▲ 완주 여부가 속도 못지 않게 중요한 내구 레이스

2014 시즌 WEC, 즉 세계 내구 챔피언십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전설의 최강자 포르쉐도 같은 이유로 복귀 시즌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WEC 개막전이었던 실버스톤 6시간 레이스에서는 14번 차량이 리타이어했고, 가장 중요한 레이스였다고 할 수 있는 르망 24시간에서는 마크 웨버와 함께 주목 받던 20번 차량이 완주에 실패하고 순위에도 들지 못했다. 특히 2014 르망 24시간의 퀄리파잉에서 토요타와 포르쉐가 1위부터 4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아우디의 2번 차량이었다.

WEC나 WRC는 그 경기 진행 방식이 현격하게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차량의 준비, 셋업과 정비, 문제 상황 대처가 경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실제 WRC의 중계에서는 F1과 달리 정해진 정비 시간의 장면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환경에 놓인 레이스카들을 어떻게 정비해 완주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모든 팀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량의 내구성이나 신뢰도에 문제가 있거나, 특정 사건 사고로 주행 가능한 수준의 정비가 불가능하다면 그 레이스에서 더 이상 승산은 없다.

F1과 같은 포뮬러 레이스에서도 WEC나 WRC 못지 않게 차량의 정비가 중요하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다른 것은 수 초 단위의 치열한 경쟁이 진행되기 때문에, 레이스 중에는 충분한 정비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미리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한 내구성과 신뢰도 높은 차량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팀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피하도록 수많은 센서가 보내오는 데이터를 관리, 분석해야만 한다. 소속 드라이버에게는 위기 상황을 피하도록 지시하고 가이드라인을 던져줘야 한다. 2014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메르세데스의 두 드라이버가 접촉한 것과 같은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도 결국 팀의 역량이다. 메르세데스가 압도적으로 가장 빠른 차를 가지고 우승을 놓친 것은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역량이 부족해서’라는 뜻이다.

 

▲ WRC 독일 랠리에서 우승을 차지한 현대 셸 월드 랠리 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무리 빠른 차를 가지고 있더라도 레이스에서 완주에 실패하면 우승은 불가능하다. 바꿔서 말하면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레드불의 리카도나 독일 랠리에서 현대의 누빌 이 거둔 우승이 결코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강력한 경쟁 우승 후보가 악조건이나 상황 판단의 실수로 경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 동안, 레이스 완주에 성공하고 변수를 피해가면서도 다른 드라이버들보다 빨리 달린 우승자에게 더 큰 칭찬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보통 스포츠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을 한다. F1이나 모터스포츠도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레이스에서 우승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지만, 그 기회를 거머쥐는 자는 따로 있다. 올 시즌 F1에서 메르세데스가 우승을 놓친 세 차례의 그랑프리에서 레드불의 리카도가 모두 우승컵을 차지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도록 항상 준비하고, 결정적인 상황에서 기회를 거머쥐는 능력이란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F1에서 우연찮게 한 두 차례의 우승을 차지하거나 요행처럼 첫 우승을 거둔 드라이버가 적지 않은데, 그런 기회가 왔음에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드라이버는 훨씬 더 많다.

물론 WRC 독일 랠리를 앞둔 셰이크다운에서 큰 사고를 당했고,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리카도는 5그리드를 차지하는데 그친데다가 스타트 직후 첫 랩에 코스 아웃과 함께 순위를 끌어올린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셸 월드 랠리 팀은 빠르게 차량을 정비했고 누빌은 마음을 다잡고 꾸준히 라트발라와 미에케의 뒤를 좇았다. 리카도는 스타트 직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빠르게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실수 없는 레이스를 펼쳤고, 레드불의 핏월에서는 정확한 전략과 함께 차량을 완벽히 관리했다. 단순히 ‘차가 빠르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종합적인 팀과 드라이버의 역량이 우승을 가져온 일등공신이었다는 뜻이다.

모터스포츠의 초창기 레이스는 그저 머나먼 도시까지 ‘완주하는 것만을 목표’로 했다. 오늘날 레이스의 목표 역시 멋지게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완주의 가치’는 종종 과소 평가되곤 한지만, 그것이야말로 레이스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완주에 성공하고 우승을 거둔 이들의 ‘우승의 가치’가 높게 평가 받는 것이다. 완주한 자들 가운데 가장 빨랐다면 그 우승의 가치를 폄하할 이유는 전혀 없다.

메르세데스의 독주 사이에서 올 시즌 세 번째 우승을 거머쥔 레드불의 리카도는 F1에서 단지 랩 타임이 빠른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폭스바겐과 시트로엥이라는 전통의 강호 사이에서 WRC 복귀 시즌을 보내고 있는 현대 셸 월드 랠리 팀과 누빌의 첫 우승 역시 레이스의 본질에 충실한 값진 우승이었다. 모터스포츠가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아는 이들이라면 리카도와 누빌의 우승에 토를 달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윤재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jesusyoon@gmail.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탑라이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