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진국 자동차 시장은 포화됐다. 살 사람은 다 샀다는 것이다. 그러자 신차들의 출시 양상도 이른바 양극화 되고있다. 실용성을 극대화한 소형 저가차량과 스포티함을 강조한 최고급 차종으로 몰린다.

같은 이유로 세계 모터쇼에는 신형 스포츠카가 말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이 중에는 포르쉐보다 서킷을 더 잘달리는 차도 있고, 가속시간이 더 빠른 차도 물론 있다. 이같이 다양한 스포츠카의 물결 속에서도 포르쉐를 개성있는 '궁극의 스포츠카'로 느끼게하는 비결이 뭘까.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인을 바꾸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 포르쉐 911(코드명 997) 터보

1950년대 자동차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타원형 램프를 달고 있지만, 요즘은 동그란 램프를 단 차를 오히려 찾기 힘들다. 그나마 꽤 오랫동안 동그란 램프를 달고 있었던 재규어 XJ나,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도 모조리 각진 램프를 달고 나오면서부터는 램프가 동그랗다는 것 만으로도 클래식한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요즘도 동그란 램프를 달고 판매되는 차는 복고 디자인인 폭스바겐 뉴비틀, 미니(MINI) 정도다.

그런데 가장 날렵하고 패셔너블해야 할 스포츠카의 디자인이 50년째 그대로니 당연히 특이하게 느껴질 수 밖에. 1963년 데뷔한 포르쉐 911은 지금껏 6차례의 세대교체가 있었지만, 어디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다. 변치 않는게 포르쉐의 힘이라는 것을 아는 포르쉐 가문의 오너들이 911 디자인 교체를 극도로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소비자들은 아직도 90년대 중반에 나온 993(공랭식)포르쉐를 그리워하고, 드림카로 삼고 있을 정도다.

포르쉐만큼 과거에 집착하는 브랜드가 또 있을까. 점차 나아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발전할수록 새로운 것을 얻는 기쁨보다 드림카를 잃는 느낌이 드는게 바로 포르쉐의 특징이다. 그래서 모든면에서 개선된 날렵한 911(코드명 991)의 등장에, 지난 911(코드명 997)의 단종이 더 아쉬워진다.

997형 911 터보의 글로벌 론칭 행사를 취재한게 2006년의 일이니 벌써 6년전이다. 포르투갈에서 997 후기형을 선보인 2008년의 행사는 정말 엇그제 같은데, 이제 997을 보내줘야 할 때가 됐다. 지금 봐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말이다.

◆ 이게 바로 포르쉐다

▲ 관광객들이 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오의 주변에 몰려들어 있다.
"오브리가도! (고맙습니다!)"
 
지중해를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몰렸다. 브라질에서 왔다는 관광객들이 내가 세워놓은 포르쉐의 사진을 찍어도 좋겠냐고 묻는다. 마음대로 찍으라 하니 포르투갈어로 '고맙다'고 외친다.
 
이곳은 유럽의 서쪽 끝인 포르투갈 까보다로까(Cabo da rocca;로카 곶)다. 정면으로는 대서양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깎아지른듯한 절벽 아래는 말 그대로 천길 낭떠러지다. 과거 유럽에 살았던 인간들은 분명 이곳이 땅의 끝이라 믿었을 것이다.

포르쉐 911 터보 신모델을 타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멀리 18시간을 날아가야 했다. 포르쉐는 최고의 모델인 911을 출시할 때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는 장소를 선택하는 일이 많아 기자 입장에선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전 911터보를 처음 론칭할 때는 호주 대륙의 북쪽끝(Top End)인 다윈(Darwin)까지 가야 했고, 때로는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까지 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피곤함에 투덜거리다가도 차를 시승해보면, 과연 고생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포르쉐 911을 얼핏보면 대부분 비슷하게 보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모델마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993이 996으로 변화하면서는 공랭식 엔진이 수랭식으로 바뀌면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뤘다. 일반인들도 노력하면 다룰 수 있는 차로 바뀌었다는게 가장 큰 차이였다. 996이 이 997로 바뀌자 일상 주행을 하는 동안은 다른 세단형 승용차와 주행감각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다루기 편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언제고 강력한 힘을 꺼내 쓸 수 있는 모델. 그게 997의 특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더 큰 차, 좋은 스포츠카인가?
 
포르쉐 프리젠테이션은 '작은차'라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세계 여러 자동차 회사들이 더 큰 엔진, 더 큰 차체를 홍보하는 가운데, 포르쉐는 반대로 더 작은 엔진, 더 작은 차체를 자랑하는 것이다. 작은게 어째서 자랑거리라는 것일까.
 
이날 포르쉐는 최신 911터보를 선보이는 자리에 911 터보의 이전 모델들을 함께 전시했다. 사실 911터보의 초대모델(930)은 1974년에 시작됐다. 260마력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힘에도 불구, 0-100km/h까지 가속시간은 불과 5.4초였다. 5000cc엔진에 507마력을 내는 최신 BMW M5와 차이가 0.8초에 불과하다. 작고 경량화 된 차체 덕분이다.
 
▲ 포르쉐 911 (997) 터보

일부 메이커들은 이제와 다운사이징을 얘기하지만, 사실 포르쉐의 경량화 철학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스포츠카는 강력한 엔진 못지 않게 덜어내는 실력이 중요한 것이다.

새로 등장한 신형 포르쉐 911 터보도 3800cc의 비교적 작은 엔진이지만, 단연코 수퍼카의 톱 리스트에 오른다. 이 납작하고 작은 엔진은 무려 500마력. 토크도 65kg·m를 내니 무시무시한 정도라 할 수 있다.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메르세데스-벤츠 등에서 만드는 경쟁모델들은 적어도 8기통이나 12기통을 갖추고 배기량은 4699cc~6204cc로 최대 출력은 477마력~560마력이다. 당시 경쟁모델 중 토크가 가장 높은 것이 메르세데스-벤츠 CL 63 AMG 엔진으로 64.2kg·m에 달했다. 포르쉐 3.8리터 엔진이 6.2리터 엔진의 토크를 넘는다니 말하자면 '하극상'이라 할 수 있었다.
 
신형 911터보는 시속 100km까지 가속력도 3.4초로 수퍼카 중 가장 빠른 수준이었다. 4초 이내에 들어서는 차들도 흔치 않지만 3.4초라면 독보적이다. 다운사이징을 표방한 페라리 이탈리아 458이 유일하게 경쟁할만한 수준이었다.

▲ 탑라이더 김한용 기자가 포르쉐 터보 911(997) 카브리오에 앉아 운전하고 있다.

당연히 가속감이 뛰어나지만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와는 차원이 다른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태리인들이 정열로 차를 만들어 짜릿함을 무기로 하고 있다면, 포르쉐는 독일인의 이성으로 만들어져 정교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느낌이다. 주행 감각 또한 이전 모델에 비해 매우 섬세해졌다.

이 차에는 '론치 컨트롤(Launch Control)' 프로그램이 장착돼 있어 전문 레이서가 아니라도 최적의 가속을 할 수 있다.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잠시 밟아주면 "삑" 소리와 함께 론치 컨트롤이 작동한다. 이제 브레이크에서 발만 떼면 차는 미친듯 튀어나간다. 정말이지 3초만에 시속 100km에 도달하는 경험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느낌이다.

이 '론치 컨트롤' 기능만 해도 페라리에도 장착돼 있긴 하지만,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이걸 사용해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고장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포르쉐 운전자 중 몇몇은 매 신호에서 출발할 때마다 론치 컨트롤을 이용할 정도다. 슈퍼카라면 매달 정비를 받고, 변속기를 소모품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포르쉐 터보는 슈퍼카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다. 평상시는 나긋하게 내조를 하다 밤만 되면 요부로 돌변하는 듯 하달까.

◆ 신형 터보는 터보압이 낮아졌다?

997 이전 포르쉐 터보는 두가지 완전히 다른 소리를 냈다. "우우웅~" 하는 소리를 내는 구간과 "쿠아아악~" 하는 소리를 내는 구간이 명백히 나뉘어져 있었다. 가속중에 갑자기 "쿠아악~!" 하는 거친 소리가 나면 차는 급발진하듯 한발 더 튀어나갔고 운전자도 갑자기 머리가 쭈뼛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 포르쉐를 몰아본 사람은 크게 두가지 반응을 보였다. 지나치게 거칠어서 곤란하다는 운전자와 오히려 그래서 더 좋다는 운전자가 명백하게 갈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신형 포르쉐는 터보압이 크게 낮아졌다. 이전 모델에 비해 무려 20%나 낮다. 배기량을 기존 3.6리터에서 3.8리터로 늘린것도 도움이 됐지만, 그보다 직분사 엔진을 채택했기 때문에 낮은 터보압으로도 충분한 동력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최대 출력은 480마력에서 500마력으로, 토크는 62kg.m에서 65kg.m로 올랐다.

▲ 포르쉐 911(997) 터보

터보압이 낮아지자 차는 터보랙도 적고 터보의 드라마틱한 변화도 없어졌다. 꾸준한 형태의 가속이 되는것이다. 말하자면 이전의 터보가 "뒤통수를 때리는 가속"이라 한다면 이번 신형 터보의 가속은 "뒤통수를 헤드레스트에 딱 붙여버리는 가속"이다.

이는 트랙을 달릴때 엄청난 장점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세계 최고의 트랙중 하나인 포르투갈 에스토릴(Estoril) 서킷에서 이틀간에 걸쳐 신형 911 터보를 꽤 자세히 살펴봤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달리고, 또 돌았다.

이에 대해 다음 글에서 다시 적어보겠다.

김한용 기자 〈탑라이더 whynot@top-rid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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