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진입로에 접어들자 사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광선검처럼 어둠을 갈랐다. 계곡을 건넌 후 자칫 지나질 뻔한 입구를 겨우 찾아 가인 캠핑장으로 들어섰다.

캠핑장은 한산했다. 오직 텐트 한 동 만이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모닥불을 쬐고 있는 캠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얼굴을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연대감을 표시했다. 그것으로 우리는 오늘 밤을 함께 할 이웃이 됐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이런 연대감을 좋아한다. 그와 내가 한 운명이란 것을 말하지 않고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를테면 마주오던 차량이 전방에 경찰이 속도위반 단속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상향등을 깜빡일 때 느끼는 그런 연대감 말이다. 그 운전자와 나는 아주 짧은 순간 스쳐 지날 뿐이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우리는 동아줄로 서로 묶은 것처럼 아주 끈끈한 연대감을 느낀다.

오늘 밤 나의 이웃이 된 그 캠퍼와 나의 연대감은 둘만의 비밀에서 나온다. 그는 가을 백양사를 알고 있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단풍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백양사 진입로가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차량 진입은 고사하고, 인파에 밀려 허겁지겁 백양사와 절을 돌아보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가 차지한 이 캠핑장은 백양사 턱밑에 있다. 이곳에서 머물면 사람들에 치일 일이 없다. 서두르면 가을 산사의 고즈넉한 아침을 독차지할 수도 있다. 그와 내가 느끼는 연대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행락객은 꿈에도 모르는, 오직 그와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백양사로 향한다. 설악산과 주왕산 등 단풍으로 이름난 명산은 많다. 그러나 나는 단풍놀이의 마침표를 항상 이곳에서 찍는다. 이곳에서 캠핑을 하며 이른 아침에 백양사와 백암산을 거니는 즐거움을 거부할 수가 없다.

‘춘백양추내장’(春白羊秋內藏)이란 말이 있다. 봄에는 백암산 백양사의 벚꽃이, 가을은 내장산의 단풍이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백양사의 가을도 봄빛 못지않다. 백양사에는 애기단풍이 있다. 잎은 작으면서 색깔이 핏빛처럼 고운 단풍잎이다. 나는 백양사 돌담에 치렁치렁 걸린 애기단풍을 보면 머릿속까지 붉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찌 이리 붉을 수 있을까.

나의 단풍산책코스는 썅계루에서 백양사를 거쳐 학바위까지다. 쌍계루는 호수에 물든 단풍과 산을 바라보는 맛이 있다. 쌍계루 앞 호수는 산이 붉으면 호수도 붉고, 벚꽃이 피면 호수도 흰옷으로 갈아입는다. 백양사 마당에서 학바위를 올려다보는 일도 가슴을 툭 터지게 한다. 대웅보전의 번쩍 들린 처마 뒤로 또 그만큼의 맵시를 자랑하며 치솟은 바위라니.

학바위까지는 다리품을 좀 팔아야 한다. 등산로가 지그재그로 난 팍팍한 오르막을 30분쯤 가야 한다. 그래도 영천암에서 한 박자 쉬어갈 수 있어 큰 힘이 된다. 등산객들은 학바위 중턱의 영천굴을 지나 상왕봉까지 간다. 그러나 단풍놀이는 영천굴까지면 족하다. 이곳에서 불바다를 이룬 단풍 속에 들어앉은 백양사를 내려다보고나면 가을을 보내도 아쉬움은 없다.

여기서 산양이 스님의 설교를 받고 눈물을 흘려 절을 백양사로 고쳤다거나 하루에 꼭 먹을 만큼씩 쌀이 나오던 굴을 부지깽이로 쑤셨더니 쌀 대신 흙탕물이 나왔다는 영천굴의 전설 같은 것은 말하지 않겠다. 백양사 사천왕문 곁에 서 있는, 전생에 네 참 모습은 어떠했느냐고 묻는 ‘이뭣고’ 탑에 대해서도 토를 달지 않겠다. 가을이면 단풍물결 속에서 오히려 더 푸른 비자나무가 내뿜는 청신한 기운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겠다. 더 보태면 잔소리일 뿐이다. 가을 백양사에 가면 다 만날 일이다.

김산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mountainfi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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