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으로 가는 행렬은 끝이 없었다. 송지면소재지를 지나면서 차량이 꼬리를 물더니 송지호해수욕장을 앞두고는 꼼짝도 안 했다. 땅끝까지는 아직도 4km는 남았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서울도 아닌, 남도의 외진 곳까지 와서 교통체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왜들 난리일까.

여름만 되면 해남 땅끝이 달아오른다. 땅끝의 강한 끌림에 이끌린 사람들이 등불을 향해 돌진하는 부나방처럼 몰려든다. 그들 가운데는 조국애에 눈뜬 청년들이 있다. 그들에게 땅끝은 나라사랑을 길어내는 우물로 통한다.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은 유혹에 이끌린 사람도 많다. 저마다 사연 하나쯤 품고 사는 사람들은 땅끝에서 혼자 보듬고 있던 고민 보따리를 풀어놓고 싶어 한다. 다시 바람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땅끝을 찾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밑도 끝도 없이 걸어서 온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하염없이 걷는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온다. 또 누군가는 텐트와 먹을거리를 이삿짐처럼 바리바리 싸들고 온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땅끝을 찾아 창끝처럼 솟은 토말탑 앞에 서서 감격해 한다. 땅의 끝에 섰노라고, 더 이상 갈 곳 없는 이 땅의 끝에 내가 왔노라고.

오랜 기다림 끝에 땅끝 캠핑장에 닿았다. 사이트는 만원이었다. 다행히 캠핑장 자리가 하나 났다. 먼저 캠핑을 했던 사람들이 장비를 챙겨 떠날 때까지 꼬박 곁에 지키고 섰다가 사이트를 차지했다. 서울서 땅끝까지, 참 힘든 하루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심이다. 며칠간은 텐트를 치거나 접을 일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휴식의 시간을 가질 일만 남았다.

땅끝에서의 일정을 곰곰이 따져본다. 하루는 아이와 함께 물놀이를 하며 지낼 것이다. 잔잔한 물살에 몸을 맡긴 채 파도 소리를 들을 것이다. 썰물이 지고 나면 조개나 소라게를 찾아 나설 것이다. 아이들의 채집본능은 유별나다. 어디를 가도 무엇인가를 뜯고, 줍고, 잡아야 직성이 풀린다. 특히, 조개나 게를 잡자고 하면 아이들은 눈이 별빛처럼 초롱초롱해진다. 아빠로서는 점수를 딸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하루는 낚시를 할 것이다. 낚시는 축 늘어진 말초신경을 단번에 바짝 세우는 힘이 있다. 그 순간은 챔질의 타이밍을 저울질 할 때 찾아온다. 낚싯대 초리가 까닥이며 입질이 오면 온 신경이 그곳으로 몰린다. 언제 챔질을 할까. 기다림 끝에 잽싸게 챔질을 할 때는 비호처럼 재빠르고 경쾌하다. 만약 낚싯대를 타고 묵직한 고기의 저항이 전해진다면 희열은 극에 달한다. 운이 좋아 횟감이나 매운탕을 끓일 만큼 잡을 수도 있지만, 살림망이 다 차지 않아도 좋다. 그저 몇 번의 손맛으로 충분하다.

또 하루는 보길도로 갈 것이다. 땅끝에서 40분이면 닿는 섬 보길도. 이 섬은 고산 윤선도의 섬이다. 국문학의 비조로 평가받는 고산이 말년에 온가족을 솔거해 이 섬에 칩거하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고산이 어부사시사를 부르며 춤을 추는 무희들을 감상하며 주안상을 받던 세연정에서 그만큼의 풍류를 느껴볼 것이다. 동천석실에 올라서는 격자봉 위로 흘러가는 구름과 눈을 맞출 것이고, 샛바우재에서는 예송리에 떠있는 고깃배들의 아름다운 행렬도 감상할 것이다. 또 팔십 삼세의 노구를 이끌고 제주로 귀향 가던 우암 송시열이 잠시 들러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글로 써놓았다는 글씐바위에서 그의 고독과 회한에도 눈길을 줄 것이다.

땅끝에 서는 것은 당연히 빼놓을 수 없다. 처음 땅끝에 서던 날을 기억한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쓰라린 마음을 안고 떠난 길이었다. 생애 절망한 시인 김지하가 자살을 결심하고 찾았다가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안고 돌아섰다는 그곳에서 나도 위로받고 싶었다. 나에게도 땅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인 이 외진 반도가 용기를 불어넣어주기를 바랐다. 그때 땅끝은 나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토말탑에 적혀 있던 손광은 시인의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수묵처럼 스며가는 정
한 가슴 벅찬 마음 먼발치로
백두에서 토말까지 손을 흔들게
십수년 지켜온 땅끝에서
수만년 지켜갈 땅끝에 서서
꽃밭에 바람일 듯 손을 흔들게
마음에 묻힌 생각
하늘에 바람에 띄워 보내게

그날, 몇 번이고 이 시를 읽으며 마음속에 잔뜩 도사리고 있는 미움과 원망을 녹였다. 서럽고 서운한 마음을 하늘에, 바람에 띄워 보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땅끝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더는 갈 수 없는 세상의 끝, 여기는 절망하는 모든 이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이다. 땅끝은 그렇게 상처받고 지친 이들을 제 품에 안아 희망과 용기를 채워서 돌려보낸다.

참, 빼먹어서는 안 될 곳이 있다. 미황사다. 나는 이 절만 가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바다를 정원처럼 끌어다 지은 절이라니. 절의 배경은 또 얼마나 황홀한가. 미황사 대웅전 너머로 창검처럼 도열한 바위병풍의 자태는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한 폭의 산수화 그 자체다. 여기에 대웅전은 들보가 훤히 보이도록 팔작지붕을 하늘로 활짝 열었으니, 화려한 산세에 조화를 이루도록 건물을 짓는 조상들의 슬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미황사 부도밭은 혼자 갈 작정이다. 산자락 두 개를 넘어가는 길은 혼자 걷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녹음은 짙어 사위를 휘감고, 산비둘기 구수한 울음소리가 동행을 자처한다.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희미해지고, 오솔길 내내 드리웠던 녹음이 열리면 거기 부도밭이 있다.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부도 가운데 나를 신화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 몇 기 있다. 부도에는 하늘로 머리를 둔 물고기와 발가락 여덟 개가 선명한 꽃게가 조각되어 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미황사 대웅전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 새겨진 꽃게를 떠올릴 것이다. 왜 이런 바다생물이 조각되어 있을까. 답은 하나다. 불교의 남방전래설이다. 땅끝에 닿은 배에 금합이 있었고, 그 금합을 열자 검은 소가 나왔다. 그 검은 소가 걸어가다 크게 울음을 울고 쓰러진 자리에 지은 절, 그게 미황사다. 창건설화는 그렇게 부처가 바다를 건너왔음을 보여주고, 그 상징으로 바다생물을 주춧돌에, 부도에 남긴 것이다. 부도밭에서 그 설화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또 무엇을 할까.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를 읽을 것이다. 아침에는 더치 오븐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베이글을 드리퍼에 내린 원두커피와 함께 먹을 것이다. 비장의 무기로 준비한 감자와 옥수수 버터구이로 아이의 입맛도 사로잡아야 한다. 해질녘에는 랜턴을 들고 해변을 산책할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지? 아! 왜 이리 할 게 많은 걸까. 나는 그저 여름휴가를 떠난 것이고, 몸과 마음을 조이던 모든 긴장을 풀고 그저 쉬고 싶을 뿐인데…. 그러나 여기는 해남 땅끝이다. 한곳에 붙박아 있기에는 볼 것도, 할 것도 많은, 삶의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땅이다.

김산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mountainfi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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