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에 혼자다. 지리산 큰 품에 혼자 남았다. 황혼의 해는 철쭉능선 너머로 지고, 멀리 남원 시가지의 불빛이 아련하게 피어난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운다. 산비둘기도 구슬픈 울음을 토한다. 팔랑치에는 노을보다 붉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그 위로 다시 핏빛의 석양이 쏟아진다.

바래봉만 오르면 마음이 푸근하다. 지리산에는 세석이나 돼지평전, 노고단, 만복대처럼 능선 위에 아늑한 초원이 많다. 그래서 후덕한 산으로 칭송을 받는다. 그 초원 가운데서도 바래봉이 최고다. 팔랑치와 세걸산을 걸쳐 정령치로 이어진 유순한 능선은 소 등처럼 부드럽다. 발치 아래 내려다보이는 운봉 들녘의 정취는 깊은 산이 아닌, 동네 뒷산을 오른 느낌이다. 그러나 눈을 돌리면 지리산의 장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천왕봉에서 반야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이어진 백리 주릉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단언컨대 지리산이 이처럼 온전히 드러나는 곳은 없다. 바래봉에 서는 순간 지리산을 다 가지게 된다. 그 매력에 이끌려 바래봉을 찾곤 했다. 바래봉 정상 밑, 제아무리 깊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가가 아지트였다. 이 샘은 한때 바래봉에 알프스를 본떠 양떼목장을 만들려고 하던 시절, 목동들의 쉼터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황혼까지 지리산 바래봉에 홀로 남은 까닭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이제 더는 지리산을 오를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남기로 한 것이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지리산과 맺은 모진 인연의 끈을 놓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또, 아버지를 부정했던 부끄러운 지난날에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이런저런 병치레로 쇠약해진 아버지는 지리산을 가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내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무슨 사연일까. 나는 갑자기 터진 아버지의 울음에 당황했다. 아버지는 실컷 목 놓아 울고 난 뒤 평생 가슴에 품고 있었던 아픈 기억을 더듬더듬 털어놨다.

스무 살 무렵, 충남 서산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로 차출됐다. 아버지가 머물던 곳은 바래봉이 내려다보이는 운봉. 당시 지리산은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던 시절이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모두 피 말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마음이 여린 분이었다. 지리산에서의 나날은 여린 아버지가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그 때 아버지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실탄이 장전된 캘빈 소총을 다루다 그만 총기오발사고가 발생했고, 그 바람에 동료 두 명이 죽었다.

그날의 사고는 아버지의 삶을 구속하는 멍에였다. 아버지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가족 누구도 몰랐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시절부터 지리산을 훑고 다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절 그런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과 작별할 순간이 다가오자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고백을 한 것이다. 내 잘못이라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아버지는 지리산에 가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실수로 숨진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속죄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힌 그날의 사건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지리산으로 모시고 가지 않았다.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것은 핑계였다. 그 시절 나는 아버지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외면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부고가 날라 왔다. 아버지가 평생 지고 왔던 그 비밀을 털어놓은 뒤 석 달 뒤의 일이었다.

살아오면서 아버지를 참 많이 미워했다. 나에게 아버지는 무능력한 사내의 표본이었다. 충청도 사투리로 ‘쑥맥같은’ 사내였다. 사춘기 때 나는 결코 아버지처럼 무능력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하곤 했다. 나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밤낮없이 밭으로 논으로 일하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식에게 밥을 굶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모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자식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꿈이 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공부 못한다고 꾸지람을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내 고민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단 한 번도 나의 졸업식에 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이란 굴레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다짐하곤 했다.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아버지를 여의고 몇 해가 흘렀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면도를 하다가 거울 속에서 문득 아버지를 발견했다. 거울 속에 청년기의 아버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아버지의 그늘이 내 얼굴에 겹쳐져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게 천륜일까. 지우고 싶다고 지울 수 없고, 끊고 싶다고 끊을 수 없는 부자지간의 인연이 이런 것일까. 그 날 이후 나는 내 속에 있는 아버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내가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슬그머니 자리를 뜬 것이다.

내 안의 아버지를 확인하는 그 때부터 나는 무섭게 아버지란 존재에 집착했다. 내 아이가 자랄수록 더욱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아버지를 모질게 부정하던 그 시절을 원망했다. 아버지를 무능한 가장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는 무능한 게 아니라 심성이 착했을 뿐이다. 그는 할 말이 많았지만 침묵했을 뿐이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칠남매의 목구멍을 책임진 가장으로 묵묵히 일 했을 뿐이다. 그리고 또, 이제 막 피어나는 청년기에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날아보기도 전에 한쪽 날개가 꺾여 있었던 것이다. 어디 아버지뿐이랴. 그 시절 이 땅의 아버지들은 그렇게,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서 구차한 인생을 살다 갔다. 그것이 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격동의 세월이라고 받아들였다.

저녁놀이 늦게까지 불탔다. 해는 벌써 졌는데도, 감홍색 놀은 오래도록 서편 하늘에 물들어 있었다. 철쭉을 훑으며 바람이 지나간다. 철쭉능선 너머로 불빛이 새록새록 빛난다. 언제 보아도 사람의 마을에 피어난 불빛은 따뜻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산정에서 바라보는 마을의 불빛일 것이다.

지리산의 큰 품에는 잉크처럼 진한 어둠이 배어들었다. 하늘에는 생보석같은 별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별들은 이내 보름달에게 자리를 내준다. 지리산의 동쪽 끝, 정확히 천왕봉 너머에서 보름달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한가위나 대보름에 보던 달보다 더 크고 매혹적이다. 보름달 아래로 하늘과 맞댄 지리산 주릉의 장쾌한 흐름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제석봉 아래 장터목산장에도 아련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직선거리로 25km는 될법한데, 그 불빛이 살아서 바래봉까지 오고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지리산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조용조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세심한 눈길로 훑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지리산을 대신 바라봤다. 내가 아버지가 되어, 내 눈이 아버지의 눈이 되어 지리산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에서 맺은 그 모든 슬픈 인연과 고단한 삶의 기억들을 훌훌 풀고 가라고 내가 아버지가 되어 바래봉에 서 있다.

저 산을 본다. 말없는 저 산을 본다. 이 산에서 상처 입은 한 영혼을 본다. 꽃 같은 시절에 입은 상처를 부여잡고 고단한 생애를 살다간 아버지를 본다. 그리고 또, 뒤늦게 그런 당신을 닮아가는 나를 본다.

김산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mountainfi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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