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김줄을 힘껏 당긴다. 텐트의 플라이가 탱탱하게 펴진다. 모서리의 팩도 뽑아 한 뼘쯤 뒤로 당겨 박는다. 늘어지는 것은 싫다. 비를 맞고 플라이가 축 처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인생이 반환점을 돌 무렵, 내 몸 어딘가에 주름이 늘기 시작했다. 뱃살은 처지고, 턱은 두겹으로 겹쳐졌다. 눈자위에도 그늘이 드리웠다. 어디 처진 것이 몸뿐이랴. 탄력을 일은 것이 피부뿐이랴. 단 한 번도 세상의 주인이지 못했던, 단 한 번도 세상을 향해 당당히 외쳐본 적 없는 지난 삶은 얼마나 굴욕적인가. 늘 삼류인생의 그늘을 벗지 못하고 누군가에 주눅이 들어 살아온 날들은 또 얼마나 무기력했나. 그러나 텐트가 쳐지는 것만큼 용서할 수 없다.

더 당길 곳은 없는가. 텐트가 다림질을 해놓은 것처럼 매끈하다. 빗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서 생기가 넘친다. 빗방울이 마치 달리기 시합이라도 벌이는 듯하다. 나뭇잎에서 뭉쳐진 커다란 빗방울이 텐트 지붕에 떨어질 때는 작은 물방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텐트 속으로 든다. 온통 흐린 날씨 탓에 시간을 분간할 수 없다. 아니 분간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 새지 않아도 시간은 저절로 바퀴를 굴려서 간다. 사각침낭 속에 몸을 누인다. 마치 관 속에 들어있는 미라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다. 눈을 감는다. 빗줄기가 사나워진다. 콩 볶듯이 요란하다. 난타의 공연처럼 수많은 파열음이 텐트를 두들긴다.

눈을 감고 있다. 빗줄기가 텐트를 뚫는다. 화살처럼 날카로운 빗방울이 침낭을 뚫는다. 비수 같은 빗방울이 가슴을 찌른다. 얼굴을 할퀸다. 빗줄기가 이미 지나온 세월의 강을 거슬러가 쓰러지거나 피 흘리거나, 혹은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상처받아 비틀거렸던 고통스런 순간들을 들추고 아프게 찌른다. 기쁜 날도, 긍정의 힘이 지배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팔 할은 상처받고, 그것을 치유하며 보낸 시간들이 대부분인 내 인생을 향해 야유하듯 퍼붓는다. 빗줄기가 그런 아픈 기억에 꽂힐 때마다 나는 서럽다. 서러워 눈물이 난다.

얼마나 흘렀을까. 빗소리가 조용히 물러간다. 나는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빗소리에 흠뻑 젖어 있다. 귀밑까지 빗물이 고여 찰랑거리는 느낌이다. 가늘어진 빗줄기는 고른 숨결로 텐트 위에 낙하 한다.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것처럼 내린다.

괜찮아, 괜찮아.

빗방울이 나를 위로 한다.

옹이 없는 인생은 없어, 인생의 나이테는 그런 옹이들이 모여 단단해지는 거야.
실컷 울어도 좋아.
텐트 안에는 너 혼자야.
여기서 남자인 척, 강한 척 할 필요는 없어.
마음껏 울어도 괜찮아.

그 위로에 또 목이 멘다.
오늘은 비처럼 울고 싶은 날이다.

김산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mountainfi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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