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막을 내린 국립오페라단의 <시몬 보카네그라>의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16~17일 양일간 호암아트홀(Met Opera on Screen)에서 열린 메트 오페라 3번째 <돈 카를로>를 만나고 왔다. 장엄하고 묵직한 느낌을 주는 오페라에 4시간 30분 가량 빠져들었다. 5막 엘리자베타가 부르는 아리아 '세상의 허무함을 아시는 신이여'에 이르러서는 함께 탄식했다. 이 부분에 이르러 더 이상 소프라노 마리나 포플라프스카야의 얼굴이 방송인 박경림을 연상시키는 네모공주로 보이지 않고 프랑스 공주이자 스페인 왕비로 완연히 느껴졌다.

사실, 바리톤 음색을 좋아하는 관계로 바리톤 로드리고 캐릭터에 기대감을 갖고 극장을 찾았으나 베이스 필리포 2세(페루치오 푸를라네토)에 매료된 채 돌아왔다. 페루치오가 부르는 4막의 베이스 아리아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다'도 가슴을 울리지만, (인터미션 시간에 보여주는)출연진 인터뷰 장면에서 들을 수 있는 평상시 목소리는 더더욱 빨려들어갈 듯 매력적이다. 마리나 포플라프스카야가 '모짜르트 같다'고 칭한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의 감각적인 지휘 역시 클로즈업으로 잡아줘 감상하는 재미가 2배다. 현장 공연에서는 만끽할 수 없는 메트 오페라만의 묘미를 누렸음은 물론이다.  

메트 오페라 <돈 카를로>는 이탈리아어 5막판인 모데나 판본으로 공연됐다. 극은 16세기 스페인 최전성기의 궁정을 배경으로 하며, 카를로와 엘리자베타가 퐁텐블로 숲에서 만나는 내용을 1막에 배치했다. 1막은 다른 막과 달리 가장 로맨틱한 분위기가 나는데, 그 결과 엘리자베타와 카를로의 엇갈린 사랑의 아픔에 더더욱 공감이 된다. 이 장면에서 돈 카를로 역 테너 로베르토 알리냐의 로맨티스트로서 면모도 엿볼 수 있다.

니콜라스 하이트너가 연출한 <돈 카를로>는 잘 만들어진 캐릭터와 선 굵은 드라마로 관객을 확실하게 설득한다. 각기 성격이 또렷하고 처한 처지가 공감이 돼 흥미롭다. 모성을 박탈당한 카를로는 아비에 의해 사랑까지 제지당한다. 극 중 카를로는 막이 내려진 뒤에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막 밖에 서 있도록 연출했다. 카를로의 약혼녀에서 국가의 뜻에 따라 카를로의 새엄마가 된 엘리자베트 역시 남편 필리포 2세의 의심을 받으며 불안하고 슬픈 궁전생활을 영위해 간다.  

강철벽을 두른 듯 냉혈한 같이 보이는 필리포2세 역시 속마음은 결코 편치 않다. 필리포의 정부인 에볼리 공녀는 엘리자베트에 대한 질투와 모략, 카를로를 향한 혼자만의 사랑이 거절당하자 분노한다. 카를로의 절친한 친구이자 원작가 실러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로드리고 역시 결코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다. 필리포 2세, 엘리자베트, 카를로 모두에게 신뢰를 받는 인물이지만 필리포 2세가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카를로를 조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페라 초보자들이 보기에 동성연애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2막 에볼리 공녀가 궁정의 여인들과 함께 '사라센의 정원에서'를 노래하는 장면으로 인해 인터미션 시간에 관객들의 호기심어린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엘리자베트의 시종인 티발트 역은 바지 역할(바지를 입고 남자역 맡아 고음 노래하는 여가수들)로 여자 소프라노가 맡고 있다. 사실, 엘리자베트 공주와 역할이 바뀐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이 참 고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시녀역 배우로 인해 초보 관객들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게 피어올랐다.  

3막의 피날레인 군중의 합창과 화형 장면은 왕과 왕비의 빨간 의상과 민중들의 검은 의상을 대조시켜 연출했다. 직접적으로 피비린내나는 장면을 연출하기 보다 의상과 조명을 적절히 사용해 시각적으로 상당히 강렬한 느낌이다. 출연진들의 기량 역시 전체적으로 우수했으나 로드리고 역 사이먼 킨리사이드는 바리톤 특유의 공명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으며, 연기적인 면에서도 간신배적인 느낌이 강해 몰입이 다소 힘들었다. 에볼리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안나 스미르노바는 3막에서 베일을 쓴 채 부르는 2중창에 이어 3중창 '조심해라, 이 가짜 아들아'장면에서 빛을 발했다. 카를로의 뒷머리를 잡아채며 보여주는 분노 역시 인상적이었다. 단, 한국 출신 테너 이용훈이 메트 오페라의 베르디 대작 <돈 카를로> 무대에 로베르토 알라냐와 더블 캐스팅됐지만 이번 호암아트홀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점은 아쉽다.

호암아트홀의 메트 오페라 시리즈 제 4탄은 5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공연되는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이다. 미국 서부 시대, 골드러시가 한창인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광부를 대상으로 하는 바(Bar)를 운영하는 여주인공 미니와 금을 훔치러 온 도둑 딕 존슨과 보안관 잭 랜스의 애틋한 이야기가 기본 줄거리이다. 배경과 분위기에 따라 쉼 없이 바뀌는 노래들. 빠른 전환에도 불구하고 미니역을 맡은 데보라 보이트가 감동의 커튼콜, 평단의 한결 같은 호평을 끌어냈다는 후문이다. 또 하나의 특이 사항은 이번 연출을 맡은 지안 카를로 델 모나코가 전설적인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의 아들이란 점이다. 

 

정다훈 객원기자 〈탑라이더 otrcoolpen@hanmail.net〉

관련기사

저작권자 © 탑라이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