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은 남자의 놀이다. 남자를 위한 소꿉장난이다. 스포츠카나 할리데이비슨에 열광하는 사나이 기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남자는 캠핑을 갈 때마다 사냥을 나선 사자처럼 야생본능이 꿈틀거린다. 꼿꼿하게 일어선 사자의 갈기처럼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다.

캠핑은 자연에 집을 짓는 일이다. 텐트는 내 집처럼 아늑해야 하며, 집에서 필요한 것은 그곳에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만드는 일은 고스란히 남자의 몫이다. 때로 거친 자연과도 싸워야 한다. ‘또 하나의 집’에 잠든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캠핑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이다. 캠핑장에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와는 무관한, 그곳에서만 통하는 특별한 힘과 질서가 있다. 이 특별한 힘과 질서는 사회적 성공이나 지위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세상에서 아주 미미한 존재로 취급받던 사내들이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하는 곳이 캠핑장이다.

텐트를 치고, 땅속 깊이 팩을 박고, 투박한 손길로 요리를 하고, 낚싯대를 드리워 고기를 잡고, 모닥불을 피워 밤을 밝히고, 침낭 속에 잠든 아이에게 밤새 팔베개를 해주고…. 이런 일들은 남자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하찮은 일’이다. 돈과 명예를 위해 일분일초도 아껴야 하는 남자의 일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하찮은 것들은 원시사회에서나 주목받을 만한 능력과 장기다.

그러나 캠핑장에서는 다르다. 그런 하찮은 일을 척척 해내는 사내들이 주목을 받는다. 머리가 아닌, 몸을 움직일 줄 하는 사내들의 존재감이 확실히 부각된다. 텐트를 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사내를 보라. 상사 앞에서 쩔쩔매는 샐러리맨이 아니다. 시계추처럼 집과 직장을 오가는 소심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캠핑장에 도착한 순간 깨어난다. 자신의 DNA에 숨겨져 있던 야생의 본능이 살아난다. 이 사회가 자신에게 씌운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려고 든다. 남자가 휘두르는 망치는 그를 구속하고 주눅 들게 하는 이 시대를 향한 것이다. 자신을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만든 잔인한 사회를 향한 시원한 돌팔매질이다.

그런 강건한 사내의 의지는 아내에게 새삼 남편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그는 더 이상 돈벌어오는 기계가 아니다. 온종일 구들장만 지고 있는 피곤한 중년이 아니다. 음식을 타박하고, 현실을 푸념하는 쩨쩨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가정을 책임지는 든든한 울타리처럼 보인다. 세상사의 거센 파도가 덮쳐도 능히 이겨낼 것처럼 보인다. 텐트에 실루엣으로 비친 사내를 보라. 그는 당당하다. 그는 장수처럼 우람하다. 일찍이 그렇게 늠름한 아빠를, 남편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캠핑을 마초의 문화로 여기면 곤란하다. 캠핑에서 부각되는 남자, 그것은 가족을 위한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그들은 자신의 근육질 팔뚝을 자랑하기 위해 망치질을 하는 게 아니다. 캠핑의 달인으로 평가받기 위해 정성을 다해 텐트를 치는 게 아니다. 가족이 머무는 휴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릴 뿐이다. 아이와 아내와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을 뿐이다. 캠핑은 아빠로, 남편으로 다시 태어나는 남자의 귀환을 의미한다.

남자, 혹은 아빠의 능력은 아이들이 알아준다. 아이들은 캠핑장에서 아빠가 하는 일, 그 하찮은 행위를 아빠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으로 여긴다. 아빠가 보여주는 그런 특별한 기술은 일찍이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아빠는 늘 피곤에 찌들어 있거나 가족의 요구에 피동적으로 응하는 무기력한 사내였다. 그랬던 아빠가 순식간에 집 한 채를 뚝딱 지어보라. 아이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아이들은 아빠가 슈퍼맨이나 맥가이버와 동급이라 여길 것이다.

자, 이제 잃어버린 야성을 회복할 시간이다. 남자로 다시 태어날 시간이다. 캠핑을 떠날 시간이다.

김산환 칼럼리스트 〈탑라이더 mountainfi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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