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을 응시하다 방향이 바뀌는 길목에서 아찔함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 '아찔함' 그대로 거꾸로 거슬러 흐르는 물줄기에 파우스트와 함께 손을 뻗고 싶어졌다. 메피스토가 제안하는 '젊음과 영혼의 거래'에 발을 담그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3월 16일 첫 무대에 오른 국립오페라단의 [파우스트](연출 이소영)는 주인공 '파우스트'의 내면과 음밀하게 대화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한국인 테너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주역 무대에 선 김우경의 국내 첫 데뷔작인 [파우스트]는 샤를 구노가 작곡한 5막의 그랜드 오페라이다. 내용은 괴테의 원작 중 1부에 중점을 뒀다. 2010년 [메피스토펠레]에 이어 국립오페라단이 올리는 ‘괴테 파우스트 시리즈’ 두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이소영 연출은 사다리를 연상시키는 철골 구조물과 자연의 품을 떠오르게 하는 숲을 양쪽에 배치해 악마와 인간의 대비, 파우스트와 마르그리트의 고립감을 살려냈다. 웅장한 무대 장치가 생략된 대신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조명을 이용해 깔끔히 정리해냈다. 또한 하얀 백지로 둘러싸인 파우스트의 방안의 문이 마치 뚜겅이 열리듯 연출한 후 아슬아슬한 공간을 걸어가는 파우스트를 내세워 호기심과 욕망을 향한 주인공의 발걸음에 관객들을 동참시켰다.

김우경이 보여준 [파우스트]는 어떻게 관객들에게 다가왔는가.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고 숭고한 선인이 되어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 뿐 아니라 그 이면에는 악의 심연을 맛보고 싶은 또 다른 욕망을 지닌 이중적인 인물이다. 김우경이 목소리 연기로 창조해낸 [파우스트]는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 하나 이야기로 쌓이는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즉, 눈으로 드러나는 거대한 성량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것이 아닌 서정적인 목소리 연기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또한 그가 서 있는 서울 예술의 전당 무대가 세계 최고의 오페라 무대인 ‘메트로폴리탄’을 연상케 해 대한민국 오페라의 현실에도 눈뜨게 만들었다.

사실. 프랑스 오페라 하면 우아한 서정성을 매력으로 꼽지만, 자짓 잘못하면 관객들을 나른한 잠으로 빠져들게 하는 함정이 있다. 누가 주역으로 서느냐에 따라 작품이 색을 달리하게 된다는 말이다. 김우경이 3막에서 부르는 서정적인 독창곡 '정결한 집'은 영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환상적 울림이 함께한다. 여기에 더해 메피스토 역 베이스 사무엘 레미 할아버지의 품 안에서도 벗어나기 힘들다. 지휘자 오타비오 마리노와 함께 무대 위 군중 뿐 아니라 객석을 지휘하며 마력을 선사한 사무엘 레미의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쭈뼛 세워졌다.

그럼에도 18일 단 하루 박준혁이 분할 메피스토펠레를 보고 싶은 욕망은 잠재우기 힘들다. 16일 공연장 로비에서 여러 번 마주쳐 말을 걸고 싶게 만들었던 베이스 박준혁은 ‘아듀 2010 송년 갈라’에서 한 차례 메피스토의 매력을 발산한 바 있다. 보다 부드러운 음색과 젊은 에너지를 가진 박준혁 메피스토는 과연 어떤 색깔의 목소리 연기를 펼칠 지 못내 궁금하다.

주역 한명 한명이 최고의 무대를 선사했다. 순결한 마음을 대변하는 여인 마르그리트 역 알렉시아 불가리두는 외모 자체가 탄성을 불러일으켰으며, 메피스토가 가져다 놓은 보석함을 열어보며 부르는 '보석의 노래'에서 안정적이고 티 없이 맑은 음색으로 감동을 몰고 왔다. 또 한명의 가수 발견은 발랑탱 역의 바리톤 이상민이었다. 함께 관람한 문외한씨의 귀에도 쏙 들어온 이상민의 명확한 가창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저 가수 도대체 누구야?"라는 질문을 이끌어냈다.

마르그리트를 짝사랑하는 시에벨로 분한 카운터테너 이동규는 바가지 머리를 하고 등장해 소년의 느낌이 물씬 났으며,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소년의 내면을 특유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전달했다. 여기에 더해 2막 후반에 메피스토가 시에벨의 목소리 톤 그대로 '그녀가 떠나버렸내'를 따라해 메피스토의 악동 같은 면 역시 감지할 수 있었다. 묵직한 음색을 내는 베이스 가수가 여성적 음색이 강한 카운터 테너 목소리를 들려줘 예상외의 인상적인 장면을 남긴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박호빈이 안무한 발레 장면은 서정적인 프랑스 오페라에 강약을 실어줬다. 2막의 장이 선 광장과 5막의 메피스토가 선사하는 환락의 밤 장면은 반복적으로 나오는 강렬한 리듬의 물결에 맞춰 무용수들이 요동치게 연출됐다. 더욱이 밤 깊은 시간까지 극을 관람하느라 체력이 떨어진 관객들의 숨겨진 욕망까지 끄집어내오며 육체가 그려내는 밤의 향연을 선보여 마지막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20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숨죽인 감동을 선사한 [파우스트]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과 영적인 구원,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며 천사들이 ‘구원받았도다’ 외치며 막을 내린다. 아니 그래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다. 16일 첫날 공연 중 마지막 영상자막에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메피스토펠레가 말하는 ‘심판받았다’란 자막을 끝으로 커튼이 닫히자 내리자 갈길이 먼 관객들은 부랴 부랴 극장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수차례 이어지는 커튼콜 타임에 자막이 떴다. 결국 일찍 자리를 뜬 관객들을 뒤로 하고 마지막 커튼콜까지 지켜본 매너 있는 관객들만이 구원을 받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됐다. 이렇듯 실수가 있었지만 이 역시 상당히 인상적인 공연의 잔상이었다.

추후 국립오페라단은 4월 7일부터 10일까지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지휘하는 오페라 [시몬보카네그라]를 선보인다.

정다훈 객원기자 〈탑라이더 otrcoolp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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