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가 플래그십 세단 XJ 라인업에 2.0리터 엔진을 추가한 것은 놀랍다. 콧대 높은 재규어는 그동안 신형 XJ 가솔린 모델에 5.0리터급 엔진과 5.0리터급 슈퍼차저 엔진만을 장착해왔기 때문이다. 동급 경쟁 모델인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나 BMW 7시리즈, 아우디 A8 등에도 최소 3.0리터급 엔진이 탑재되는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행보다.

시승을 앞두고도 쉽게 이해 되지 않았다. ‘과연 1억원 넘는 가격의 차를 타는 사람이 2.0리터 엔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의구심마저 들었다. 아무리 터보를 달아 동력 성능을 높였다고 해도 럭셔리 세단인 XJ급에 2.0리터 엔진은 부족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 재규어가 플래그십 세단인 XJ에 2.0리터급 터보 엔진을 장착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 측은 XJ에 장착된 2.0 터보 엔진은 강력한 성능은 물론이고, 8단 자동변속기와도 궁합이 잘 맞아 뛰어난 주행 능력과 우수한 연료 효율성을 발휘한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또, 다운사이징 엔진을 장착해 가격이 낮아져 경쟁 모델보다 수천만원 가량 저렴한 가격 경쟁력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럭셔리 세단 시장에 ‘숨어있는 1인치’를 노린 재규어 XJ 2.0P 럭셔리 LWB(롱휠베이스) 모델을 시승해봤다. 

◆ XJ 2.0 가솔린 터보, 럭셔리 세단 시장 바꿀까?

▲ 재규어가 XJ 2.0 터보가 남해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다. 우측은 XF 3.0 슈퍼차저

재규어는 레인지로버 이보크를 통해 2.0 가솔린 터보 엔진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듯 하다. 1820kg의 이보크를 경쾌하게 움직이는 이 엔진의 성공은 1825kg급 XJ에 적용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물론 파격적인 시도다. 다운사이징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경쟁사들은 2.0리터급 엔진을 플래그십 모델보다 한 단계 낮은 E클래스, 5시리즈, A6 등에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XJ 2.0 모델의 성공 여부는 럭셔리 세단 시장의 판도를 변화 시킬  중요한 이슈기도 하다. 

▲ 재규어 XJ에 적용된 드라이브 셀렉터

시동을 켜자 재규어 특유의 셀렉트 드라이브가 솟아 올랐다. 일반 차량이었다면 기어봉이 없어 조작감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재규어 같은 럭셔리 세단에서는 오히려 고급스러움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기어봉의 조작감은 핸들 뒤에 위치한 패들시프트가 대신하는데, XJ에 장착된 패들시프트는 잡기도 편하고 촉감도 만족스러워 변속 조작에 대한 아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계기판은 3개의 클러스터로 깔끔하게 구성됐는데 우측은 회전계, 가운데는 속도계, 좌측은 주유 및 주행정보가 표시된다. 

▲ 재규어 XJ의 계기판

시승은 남해 해안도로를 거쳐 고속도로를 달리는 약 150km 구간에서 진행됐다. 구불구불한 해안도로에서는 핸들링과 승차감 등을, 쭉 뻗은 고속도로에서는 가속력과 차체 안정성 등을 테스트하기에 좋은 코스였다.

◆ XJ다운 안락한 승차감…저속에서는 묵직하면서 매끈해 

가속페달을 밟자 차체가 생각 이상으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보크가 조용하면서도 가볍게 반응했다면, XJ는 묵직하면서도 매끈한 느낌이 강했다. 처음부터 빠르게 튀어나가지는 않지만, 한 번 숨을 고른 후 낮고 강하게 움직인다. 고급 세단에 어울리는 만족스러운 세팅이다.

▲ 해안도로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도 XJ 2.0 터보의 큰 차체는 묵직하고 매끈하게 달린다

큰 차체에 비해 주행 안정성과 핸들링의 반응도 매우 우수했다.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몸뚱이를 이렇게 능숙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은 놀랍다. 특히, 휠베이스도 3미터가 넘어 조향력이 떨어질 것이라 예상했는데, 해안도로에서 만난 생각지도 못한 급커브와 와인딩 코스,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블라인드 코스를 민첩하고 안정적으로 빠져나갔다.

▲ 재규어 XJ의 2.0 터보 엔진은 알루미늄으로 작고 가볍게 만들어졌다

저속에서는 마치 산책을 나온 듯 여유롭다. 힘이 부족하지도 않고, 조향력도 좋으며, 엔진이 차체 깊숙이 위치해 소음과 진동이 실내로 거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낮고 안정적인 차체와 최고급 가죽의 시트의 조합은 몸을 편안하게 받쳐줘 주행 자체가 안락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 2.0 터보와 8단 변속기의 조합…고속 주행 문제 없어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가장 궁금하게 느꼈던 고속 주행 능력을 테스트했다. 변속기를 S(스포트)로 바꾸고 다이내믹 모드 버튼을 누르니 계기판 붉은색으로 변하며 반응했다. 변속 타이밍이 한 박자 늦어지며 고 rpm에서 변속돼 차가 가속력을 잃지 않은 상태로 빠르게 치고 나갔다. 계기판 바늘이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띄게 빨라지며 기분 좋은 엔진음이 흘러나왔다. 

▲ 변속기를 스포트모드로 놓고, 다이내믹 모드 버튼을 누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패들시프트를 이용해 6000rpm 이상에서 수동변속을 하며 주행을 시도했다. 단단해진 서스펜션과 민감해진 스로틀 반응이 몸으로 전달돼 나도 모르게 가속페달에 힘을 주게 됐다. 상당히 빠른 속도까지 가속해 보아도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도 제동력은 예상했던 것만큼 발휘됐고, 고속에서도 우수한 핸들링으로 제어력을 잃지 않았다. 요철이나 급커브를 지날 때도 묵직한 차체 안정성이 느껴져 불안감이 들지 않았으며 소음·진동 차단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 XJ급 차에 2.0리터급 엔진을 달았어도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재규어 2.0 가솔린 모델에 장착된 엔진은 2.0리터급 직렬 4기통 터보로, 최고출력 240마력, 최대토크 34.7kg·m를 발휘한다. 제원상 성능은 경쟁 모델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가변식 터보를 적용으로 터보렉을 최소화하고, 엔진과 차체를 알루미늄으로 제작해 차량 무게를 200kg 가량 가볍게 만들어 주행 성능에는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 동력성능이 부족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2.0 터보 엔진은 XJ를 능숙하게 끌고 나간다

2013년형 XJ 전 모델에는 8단 자동변속기가 기본으로 적용됐다. 고속 주행에 사용되는 최고성능은 5단에서도 충분히 발휘돼 굳이 8단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 관계자는 8단 변속기는 연비 향상에 도움이 되며, 기어비 간격을 촘촘하게 조정해 초반부터 빠른 변속을 통해 부드러운 가속력을 내도록 했다고 밝혔다. XJ 2.0 가솔린 터보의 복합연비는 9.2km/l다(도심 7.8km/l, 고속 11.7km/l).

◆ 이안 칼럼이 다듬은 세련된 외관과 깔끔한 실내

소비자들이 평가하는 재규어 XJ 디자인은 호불호가 극명히 갈린다. 구형 모델의 클래식함이 사라져 아쉽다는 의견도 있지만 보다 현대적이면서 세련되게 변했다는 긍정적인 반응도 있다. 신형 XJ는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이안 칼럼의 손을 거쳐 물 흐르듯이 부드러운 실루엣을 완성했다.

▲ 신형 XJ의 디자인은 호불호가 갈리곤 하지만, 이안 칼럼의 손을 거친 차체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전면부에는 커다란 매시 타입의 그릴과 날렵한 헤드램프가 적용돼 강인한 인상을 준다. 측면부는 길쭉한 전면 라인이 쿠페 느낌의 후면부까지 매끈하게 이어져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역동적이다. 후면부는 세로로 길게 뻗어있는 테일램프와 트윈 머플러, 심플하게 처리한 디테일 등이 적용됐다.

XJ의 실내는 동급 럭셔리 세단 중 가장 깔끔해 보인다. 길쭉한 기어노브 대신 시동을 걸면 솟아오르는 셀렉트 드라이브가 적용된 탓이 큰데, 각종 조작 버튼을 비롯한 전체적인 센터페시아 디자인이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클래식하지도 않아 인상적이다. 실내 곳곳에는 수작업으로 마무리한 가죽 소재들과 원목을 이용한 디자인 등이 적용돼 재규어 특유의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 XJ의 실내는 동급 경쟁 모델 중 가장 깔끔한 느낌을 준다

또, 2013년형 XJ에는 메르디안 프리미엄 오디오 시스템이 탑재돼 20개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최적의 사운드를 즐길 수 있다. 시승 당시 차 안에 들어있던 음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딱히 불만을 털어놓지 못할 정도로 사운드가 만족스러웠다. 뒷좌석 공간은 다리를 꼬고 앉아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넉넉하며, 앞좌석 헤드레스트 뒤쪽에 장착된 8인치 LCD 화면을 통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이용할 수 있다.  

◆ 럭셔리 세단에 2.0 엔진?…'없어도 좋고, 있으면 더 좋고'

시승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과연 5미터가 넘는 럭셔리 세단 XJ에 2.0리터급 4기통 가솔린 터보 엔진이 필요한가였다. 시승 후 내린 결론은 '없어도 좋도, 있으면 더 좋고'였다. 그동안 동급 경쟁 상대 중에는 2.0 모델이 전무했기 때문에 '필요 없는 차'일 수도 있으나, 다운사이징으로 가격을 내려 럭셔리 세단의 구입 장벽을 낮춘 '필요한 차'이기도 하다. 

▲ XJ 2.0 가솔린은 디젤차에 거부감이 있는 여성 고객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차다

실제로 XJ에 2.0리터급 엔진을 장착하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낮아진 가격대다. XJ 2.0 럭셔리 SWB(스탠다드 휠베이스)의 가격은 1억990만원으로, 편의사양에 차이는 있지만 1억3~4천만원에서 시작하는 3.0리터급 이상의 고배기량 모델에 비해 3000만원 가량 낮다. 이날 시승한 XJ 2.0 럭셔리 LWB(롱휠베이스)의 가격도 1억2190만원으로 천만원 가량 저렴하다.

게다가 럭셔리 세단 중 가격이 저렴한 모델에는 모두 디젤 엔진이 장착됐다. 디젤 모델에 거부감이 있는 소비자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모델이다.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에 따르면 재규어 소비자 중 절반 정도는 메르세데스-벤츠나 BMW에서 넘어온다고 한다. XJ 2.0 터보 모델은 이들을 공략하기 가장 좋은 틈새 시장 '숨겨진 1인치'가 아닌가 싶다. 

전승용 기자 〈탑라이더 car@top-rid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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