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를 가진 자동차는 많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모습과 성격을 유지해 온 차는 드물다. 자동차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고 진화해가며 적응하기 마련인데 70여년의 세월동안 고집불통인 차도 있다. 바로 지프 랭글러가 그렇다.

다소 무식하게 보이는 각진 디자인, 탈탈거리는 디젤 엔진, 타고 내리기 불편할 정도로 높은 지상고, 불편한 뒷좌석 등. 요즘 유행하는 전륜구동 SUV으로선 이해가 안되겠지만, 지프 랭글러는 이런 점이 오히려 매력이다.

▲ 지프 랭글러 사하라 언리미티드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그 순수성과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는 지프. 그 중에서 그나마 도심이나 고속도로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지프 랭글러 사하라 언리미티드’를 시승했다.

◆ 지프 특유의 디자인, 강한 남성의 상징

어린 아이에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하나 쥐어주고 ‘짚차’를 그리라하면, 어렵지 않게 각진 지프를 그려낼 것이다. 또 지프 랭글러를 실제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도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지프의 디자인은 매우 단순하고 사람들 머릿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반듯한 직사각형 바디, 원형 헤드램프, 7개의 슬롯 그릴 등 랭글러의 특유의 디자인적 특징은 도심에 적합하도록 제작된 랭글러 사하라도 예외는 아니다.

▲ 지프 랭글러의 특유의 디자인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도시적인 디자인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디와 동일한 색상의 하드탑과 펜더를 적용했고 승하차가 용이하도록 사이드스텝을 달리 했지만 랭글러 루비콘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실내 디자인은 매우 단출하다. 멋 낸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소 투박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단순하고 직관적인 것이 랭글러의 멋이다. 단순하지만 엉성하지는 않고 사용하기 편리하다.

◆ 바닷물이 빠진 갯벌은 랭글러 전용 놀이터

서해안의 한 해수욕장. 바닷물이 빠지자 질척한 갯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검은 갯벌 위로 관광객을 태운 트랙터가 유유히 움직이고 있다. 순간, 갯벌에 바퀴 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든다. 아무리 도심에 적합한 랭글러 사하라지만 태생을 감출 수는 없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천천히 모래사장으로 들어선 후 ESP를 끄고 사륜구동 모드로 변경했다. 힘차게 가속페달을 밟아 갯벌로 뛰어들었다. 산도 아니고 강도 아니다. 2톤이 넘는 거구가 갯벌 위에서 춤을 춘다. 일반 도로를 달릴 때와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거침없다. 갯벌을 질주하다 급하게 방향을 바꾸면 차체가 미끄러지는 드리프트도 가능하다.

▲ 랭글러에게 갯벌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불규칙한 웅덩이가 많은 갯벌이지만 거칠 것이 없다. 때론 유연하게 거친 노면을 타고 달리는가 하면 미끄러운 갯벌을 강하게 움켜쥐고 원하는 방향으로 손쉽게 움직였다. 이런 적응력은 지프가 왜 모든 SUV의 아버지인가를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지구가 멸망해도 바퀴벌레와 랭글러는 살아남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쨌든 확 트인 갯벌 위를 달리는 것은 기자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갯벌 위에서의 질주는 너무나 짜릿해서 잠시 냉정함을 잃게 했다.

해수욕장 주변 식당에서 도움을 받아 머드마사지한 랭글러 사하라를 서둘러 세차했다. 차체 밑바닥과 휠 주변에 묻어 있는 염분 가득한 진흙을 제거해야 했다.

▲ 불규칙적인 웅덩이도 거침없이 달릴 수 있다

식당 주인은 “간혹 술 취하신 손님들이 멋을 부리기 위해 SUV로 갯벌에 들어가긴 하지만 제 힘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관광객을 태운 트랙터를 가리키며 “저 트랙터가 단지 관광객을 태우고 돌아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고 덧붙였다. 

◆ 랭글러 사하라, 도심과 고속도로에서는 어떨까?

랭글러 사하라는 매우 크다. 차체의 높이나 시트포지션이 매우 높다. 마을버스 운전기사와 눈높이가 비슷하고 톨게이트에서는 여직원을 내려다보게 된다.

시트의 착좌 자세도 꼿꼿해서 자동차 시트라기 보다는 사무실 의자에 앉은 기분이었다. 간혹 스포츠카나 시트포지션이 낮은 차를 운전할 때 허리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랭글러 사하라는 아주 반듯한 자세로 운전할 수 있다.

▲ 랭글러 사하라의 실내 디자인은 단출하다

또 제동페달과 가속페달은 바로 앉은 자세에서도 편안하게 밟을 수 있도록 위치했다. 마치 피아노 페달을 밟는 느낌이다.

시트포지션이 높기 때문에 전방 시야가 매우 탁월하기 때문이다. 도로의 흐름이나 연비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앞차보다 선행하는 차를 보고 운전하는 것이 좋다. 랭글러 사하라는 앞차의 서너 대 앞까지 훤히 내다볼 수 있다.

막히는 도심에서 랭글러 사하라가 불편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엔진소음이나 진동,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뒷좌석 승차감을 제외하면 운전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편하다.

▲ 수동으로 구동방식을 전환할 수 있다

가속페달을 밟았을 때 반응이 신속하진 않지만 꾸준하게 힘을 전달해주고 수동모드로 시프트다운 했을 때 느껴지는 순간적인 가속능력도 괜찮은 수준이다. 도심에 적합하게 제작된 크로스오버에 비하면 고속주행에서 부족함이 많지만 국내 고속도로의 규정속도 안에서는 스트레스 없이 고속주행이 가능하다.

◆ 소소한 장단점 살펴보니

기자는 평소 연비운전과 거리가 먼 운전습관을 가지고 있다. 기름이 가득 찬 시승차를 받고 약 500km를 넘게 달렸다. 트립컴퓨터에는 아직도 100km를 더 갈 수 있다고 표시된다. 연료탱크가 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주유로 약 600km 넘게 갈 수 있을지는 상상조차 못했다. 도심, 고속도로, 오프로드 등을 내달린 시승차의 평균연비는 약 리터당 11km 정도였다.

▲ 지프 랭글러 사하라는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가리지 않는다
▲ 지프 랭글러가 가는 곳이 곧 길이다

아쉬운 점을 몇 가지 뽑자면 내비게이션을 가장 먼저 들 수 있다. 랭글러 사하라에는 지니의 내비게이션이 장착됐다. 내비게이션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문제는 없지만 라디오나 음악을 들을 때 멀티테스킹이 되지 않는다. 라디오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내비게이션의 안내 메시지만 들을 수 있고 지도는 볼 수 없다.

▲ 라디오나 음악을 들으며 지도를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시승을 하는 동안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두꺼운 하드탑을 열고 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드탑은 제거하는 방법도 복잡하고 하드탑을 보관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시도하지 못했다. 또 하드탑의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성인 남성 서너명은 필요해 보였다.

◆ 차를 타는 것이 곧 레저가 되는 랭글러

요즘 사람들은 마땅히 스트레스를 풀 공간이 없다. 여행을 떠나도 꽉 막힌 고속도로를 지나야 하고 아스팔트 위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 힘들게 여행지에 도착해도 술만 먹다 돌아오는 것이 태반일 것이다.

▲ 지프 랭글러와 떠날 준비가 됐는가?

하지만 지프 랭글러를 탄다면 조금은 특별한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광활한 트렁크에 여행에 필요한 짐을 가득 싣고 한적한 국도를 달리면서 산과 강, 바다 어디든 갈 수 있다. 뜨거운 열기만 내뿜는 아스팔트를 벗어나 흙과 나무의 냄새를 가까이에서 맡아보자. 랭글러와 함께라면 아무도 가진 못했던 길을 가는, 오직 나와 랭글러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김상영 기자 〈탑라이더 young@top-rid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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